[정유진의 조향산책] 향(香), 잊고 있던 나를 깨우는 감각의 언어

기획·특집 | 정유진  기자 |입력

조향사 안솔
조향사 안솔

수업을 하며 사람들이 향을 맡는 찰나, 저는 향기보다 그들의 표정을 먼저 살핍니다. 살짝 풀리는 눈가, 툭 내려놓는 어깨, 깊어지는 숨소리. 때로는 그 너머에 짙게 배어 있는 피로의 흔적까지도 함께 읽어내곤 합니다.

조향에 몰입한 이들을 보고 있으면 나이와 성별을 불문하고 모두가 잠시 어린아이처럼 순수해집니다. 고요한 집중 속에서 맑아진 얼굴들을 마주할 때마다, 저는 이 찰나의 순간들이 얼마나 소중한지 새삼 깨닫습니다.

사실 제 첫 직업은 향과는 거리가 먼 방사선사였습니다. 병원의 차가운 공기 속, 일렬로 앉아 초조하게 차례를 기다리던 사람들. 그 긴장된 풍경 안에서 저 역시 숨을 고르며 하루를 보내곤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사소하지만 선명한 감각들이 겹쳐 다가왔습니다. 창틈으로 스며든 따뜻한 아침 햇살, 지저귀는 새소리, 창문을 열자마자 밀려들던 서늘한 공기와 커피 한 잔의 온도. 그 모든 일상이 문득 '향기'로 읽히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향은 코로만 맡는 것이 아니라 삶 전체로 받아들이는 감각이라는 것을요. 이 경이로운 감각을 혼자만 알고 있기엔 너무나 아깝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망설임은 없었습니다. 그렇게 저는 한순간에 향의 세계로 발을 내디뎠습니다.

향을 배우고 나서 제 세상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음식도, 풍경도, 사람과의 만남조차 하나의 고유한 향으로 남기 시작했으니까요. 하루의 공기와 계절의 온도, 찰나의 감정까지 자연스럽게 기록되었습니다. 덕분에 제 삶의 결도 이전보다 훨씬 풍성하고 단단해졌습니다.

수업 도중, 눈을 감고 향을 맡던 한 분이 조용히 읊조렸습니다. “아… 갑자기 마음이 좀 편해졌어요.” 그 한마디는 제게 이정표가 되었습니다. ‘나는 향을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감정을 느끼고 그것을 향으로 번역하는 사람이구나.’

향은 참 특이합니다. 말보다 빠르고, 생각보다 깊으며, 설명하지 않아도 어느새 마음 깊숙이 스며듭니다. 그래서 저는 향을 단순한 냄새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잊고 있던 감정과 기억을 다정하게 깨우는 가장 정직한 언어라고 믿습니다.

제가 만드는 향은 화려하지 않습니다. “강하다”는 감탄보다 “편안하다”는 안심을 주는 향, 트렌드를 쫓기보다 숨 쉬기 좋은 결을 먼저 생각하는 향을 지향합니다. 무엇보다 자기 자신에게 가장 솔직해질 수 있는 향이기를 바랍니다.

최근 좋은 인연으로 홍석준 필라테스 강사님과 협업 수업을 진행하며 확신한 것이 있습니다. 몸을 움직여 감각을 열면, 향은 더 깊은 곳까지 닿는다는 사실입니다. 호흡과 몸, 그리고 마음을 차례로 느끼는 그 경이로운 과정 곁에서 저는 조용히 조력자가 됩니다.

저는 이런 조향사이고 싶습니다. 트렌드보다 나만의 감각을 믿고, 복잡함보다 숨 쉬는 간결함을 택하며, 팔기 위한 향보다 머무는 향을 만드는 사람. 빠른 결과보다 천천히 쌓여가는 변화의 힘을 믿는 사람 말입니다.

앞으로 이 칼럼을 통해 향이 우리 몸에 닿는 방식, 수업 현장에서 만난 이들의 내밀한 이야기, 조향사로서 겪는 시행착오와 공간 및 감정의 관계 등을 나누려 합니다.

정답을 제시하는 글이기보다, 향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나’를 조금 더 깊이 이해해가는 기록이 되길 바랍니다.

저는 감정을 향으로 번역하는 조향사, 안솔입니다.

글 : 정유진 (조향사 안솔) @ansol.scent
- ‘Pilates & Scent’ 웰니스 프로그램 운영
- 향 제품 제작 · 판매
- 페레(PERE) 협업 및 제품 협찬
- 교회 향 프로젝트 협업
- 브랜드·공간 향 개발 & 클래스 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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