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유진의 조향산책] 향기, 기억을 깨우고 마음을 잇다

기획·특집 | 정유진  기자 |입력

Pinterest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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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길 엘리베이터 안을 채운 누군가의 향수, 카페 문을 열자마자 밀려오는 커피 향, 점심 무렵 코끝을 스치는 음식 냄새. 집에 돌아와 코트에 남은 서늘한 바깥 공기를 지나, 갓 마른 옷에서 올라오는 포근한 향까지. 우리의 하루는 이처럼 수많은 향의 마디로 이어집니다.

우리는 의식하지 못한 채 향기 속에서 움직이고, 휴식하며, 다시 돌아옵니다. 어떤 날은 평범한 커피 향이 유난히 달콤하게 다가오고, 어떤 날은 아끼던 향수조차 부담스럽게 느껴지기도 하죠. 같은 공간에서 같은 향을 맡아도 누군가는 미소 짓고, 누군가는 추억에 잠기며, 누군가는 말없이 코끝을 맴돕니다. 이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 걸까요.

향기 수업이 끝나면 저는 참여자들이 만든 향을 하나하나 정성껏 맡아봅니다. 향료의 비율과 중심이 되는 노트, 그리고 그날 그 사람의 컨디션까지 향기 안에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 수업 중 한 분의 향을 맡는 순간, 아주 오래된 냄새가 마음을 툭 건드렸습니다. 할머니 댁의 포근한 공기, 그 안에 섞여 있던 할머니 특유의 알싸한 향. 순간 말문이 막혔습니다. 분명 타인이 만든 향을 맡고 있었는데, 그 너머에서 제가 자라온 시간을 마주하고 있었으니까요.

그때 다시금 깨달았습니다. 향은 단순히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잠들어 있던 ‘기억’을 소환하는 감각이라는 것을요. 오감 중 후각은 유일하게 감정과 기억을 담당하는 뇌 영역과 직접 연결되어 있습니다. 덕분에 향을 맡으면 이성적인 판단보다 몸의 반응이 먼저 나타나죠. 이를 ‘프루스트 현상(Proust Phenomenon)’이라 부릅니다. 향기가 잊고 있던 감정의 문을 여는 열쇠가 되는 셈입니다.

향기는 코끝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각자의 경험과 기억이라는 통로를 지나 마음 깊숙한 곳까지 와닿습니다. 아침과 밤의 향기가 다르게 느껴지는 이유는 우리의 피로도와 마음의 여유, 체온과 피부 상태에 따라 향을 받아들이는 방식이 매 순간 변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향에는 정답이 없습니다. 향기에 대한 반응은 각자가 살아온 시간과 몸이 기록한 고유한 신호입니다. 시트러스에서 활력을 얻든, 우디에서 안정을 찾든, 그 모든 반응은 ‘나’라는 사람의 상태를 알려주는 정확한 지표입니다.

향을 고른다는 것은 향기를 따라 지금의 나를 조금 더 천천히 느껴보는 일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향을 고르는 것이 아니라, 내 몸이 보내는 신호를 읽어내는 법을 배우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오늘따라 익숙한 향이 낯설게 느껴진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당신의 마음과 체온, 오늘의 습도까지 살피며 향기와 나를 천천히 다시 만나보세요.

글 : 정유진 (조향사 안솔) @ansol.scent
- ‘Pilates & Scent’ 웰니스 프로그램 운영
- 향 제품 제작 · 판매
- 페레(PERE) 협업 및 제품 협찬
- 교회 향 프로젝트 협업
- 브랜드·공간 향 개발 & 클래스 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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