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도봉구 방학동에서 만난 문화독립운동가 간송 전형필](https://cdn.www.jachiuijeong.co.kr/w900/q75/article-images/2026-11-02/fbb504ac-bcac-41b9-9164-aa777b5346b9.png)
연산군묘 앞 대로에서 700m쯤 가면 사재를 털어 우리 문화유산을 지켜낸 간송 전형필(全鎣弼, 1906~1962)의 옛집(시루봉로 149-18)이 나온다.
100년이 넘은 고택이다. 조선 최고의 부호였던 간송의 양부 전명기(全命基, 1870~1919)가 인근 농장과 황해도 등지에서 올라오는 곡식을 관리하기 위해 지은 집이다. 양부가 세상을 떠난 뒤 간송은 이 주변에 묘역을 조성하고, 제사나 차례를 지낼 때 이 집을 재실(齋室)로 사용했다.
간송의 묘도 이 집 왼쪽 언덕 위에 있다. 집을 정면으로 바라볼 때 오른쪽에는 양부 전명기의 묘가 있고, 왼쪽에는 전형필과 부인 김점순의 합장묘가 자리한다.
6·25전쟁 당시 집은 담장과 대문 일부가 파손됐다. 종로 본가와 보화각을 먼저 수리하느라 이곳의 피해 복구는 늦어졌다. 1962년 간송이 세상을 떠나고 종로 본가가 철거되면서 그곳의 자재를 활용해 부분적인 수리가 이뤄졌다.
간송은 경성에서 손꼽히는 부잣집의 2남 4녀 중 막내아들이었다. 간송의 증조할아버지 때 현재의 종로4가 배오개에서 장사를 시작해 종로 상권을 휘어잡았다. 간송은 숙부인 전명기의 양자로 들어가 성장했다.
휘문고등보통학교(현재의 휘문고등학교)에 다닐 때 미술교사였던 춘곡 고희동(春谷 高羲東)의 영향을 받았다. 춘곡은 도쿄미술학교에서 서양화를 공부한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다. 이후 간송은 와세다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했다.
부모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간송은 젊은 나이에 막대한 재산을 물려받았다. 당시 10만 석을 거두는 거부였다. 원하면 무엇이든 이룰 수 있을 만큼의 재산을 물려받았지만, 간송은 이를 우리 문화유산을 지키는 데 쓰기로 결심했다.
그는 문화재 수집을 자신만의 독립운동으로 여겼다. 서울 인사동의 고서점 한남서림을 인수한 뒤 오래된 책과 그림, 도자기 등을 사들였다. 우리 문화재가 일본으로 유출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값을 아끼지 않았고, 소장자가 원하는 가격보다 후하게 쳐주기도 했다.
![[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도봉구 방학동에서 만난 문화독립운동가 간송 전형필](https://cdn.www.jachiuijeong.co.kr/w900/q75/article-images/2026-11-02/1f326897-d4c7-4aeb-b48f-fcb213354c88.png)
고려시대 상감청자의 걸작인 국보 제68호 '청자상감운학문매병(靑磁象嵌雲鶴文梅甁)'도 그렇게 지켜냈다. 일본인 골동품상 마에다 사이이치로(前田佐一郎)가 소장하고 있던 매병이었다. 그는 이 매병을 2만 원에 팔려고 했다. 당시 서울의 기와집 스무 채를 살 수 있는 거금이었다.
간송은 망설이지 않고 2만 원을 지불해 매병을 사들였다. 이 매병의 가치를 알아본 또 다른 일본인이 구입가의 두 배를 주겠다며 자신에게 팔라고 제안했지만, 거절했다. 대신 이보다 더 좋은 청자를 가져오면 자신이 산 가격에 넘겨주겠다고 했다.
1936년에는 조선백자 한 점을 두고 경매가 벌어졌다. 백자청화철채동채초충난국문병(白磁靑畵鐵彩銅彩草蟲蘭菊文甁)이었다. 일본인 수집가와 간송이 끝까지 경쟁했다. 낙찰가는 1만 4,580원. 마지막에 이 백자를 손에 넣은 사람은 간송이었다. 이 백자는 현재 국보로 지정돼 있다.
조선시대 화가 신윤복(申潤福)의 '미인도'가 일본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한걸음에 달려가 3만 원을 주고 사 오기도 했다. 일본에 있던 영국인 변호사 존 개스비(John Gadsby)로부터는 고려청자 20점을 기와집 400여 채 값에 해당하는 40만 원에 사들였다.
백미는 국보 제70호 '훈민정음 해례본(訓民正音解例本)'이다. 1943년 여름, 경북 안동에 훈민정음 해례본이 매물로 나왔다는 소식을 접한 간송은 서둘러 구매에 나섰다.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가 이 책의 존재를 알게 되면 빼앗길 수도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소유자는 1,000원을 불렀지만 간송은 1만 원을 지불하고 책을 사들였다. 중개인에게도 별도의 수고비를 챙겨줬다고 한다. 그렇게 사들인 책을 소중히 보관하다가 광복 이후 세상에 공개했다. 오늘날 우리가 훈민정음 창제 원리와 사용법을 상세하게 기록한 귀중한 자료를 볼 수 있는 것도 간송 덕분이다.
골동품 수집에 가산을 모두 탕진한다는 험한 소리를 들으면서도 평생 우리 문화유산을 모으고 지켜냈다. 손수 지은 보화각(葆華閣 보물을 간직한 집)은 간송이 세상을 떠난 뒤 간송미술관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간송은 1962년 1월 급성신우염으로 세상을 떠났다. 만 55세였다.
간송(澗松)은 계곡 시내를 뜻하는 '간(澗)'과 소나무 '송(松)'을 쓴다. 한겨울에도 푸른빛을 잃지 않고 그 자리를 지키는 소나무처럼, 우리 문화유산을 지키겠다는 뜻을 담은 호다. 간송에게 큰 영향을 준 위창 오세창(葦滄 吳世昌)이 지어준 이름이다.
간송의 옛집에서 간송을 떠올리며 감사의 인사를 했다.
도봉구는 보물창고 같은 곳이다. 추억 속 만화 '아기공룡 둘리'의 고향이고,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의 배경으로도 친숙한 곳이다. 조금만 관심을 갖고 돌아보면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역사와 인물의 이야기가 숨어 있다.
돌아보는 것만으로도 얼마든지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곳은 멀리 있지 않다. 혼자여도 좋다.

글 : 조수진 전 국회의원
- 제21대 국회의원(전 양천갑 당협위원장)
- 국민의힘 수석최고위원, 최고위원
- 제21대 국회 법제사법, 국회운영위원
- 동아일보 정치부 기자, 논설위원
- 채널A '직언직설' 앵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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