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성군 세종의 빛에 가려진 소헌왕후(昭憲王后), 세종과 소헌왕후의 여주 영릉(英陵)

기획·특집 | 조수진  기자 |입력

태종의 정치적 숙청으로 무너진 친정과 소헌왕후의 인내 아들들을 먼저 떠나보낸 왕비의 슬픔과 세종의 추모 여주 영릉에 함께 잠든 세종과 소헌왕후의 역사

[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성군 세종의 빛에 가려진 소헌왕후, 세종과 소헌왕후의 여주 영릉
[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성군 세종의 빛에 가려진 소헌왕후, 세종과 소헌왕후의 여주 영릉

소헌왕후 심씨(昭憲王后 沈氏, 1395~1446)는 세종의 정비다. 세종은 한국 역사상 최고의 성군으로 꼽히며, 소헌왕후 역시 모범적인 조선 왕비의 본보기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소헌왕후의 삶은 평탄하지 않았다. 시아버지 태종에 의해 친정이 참화를 당하는 것을 지켜봐야 했고, 왕실 가족에게 닥친 수많은 비극을 묵묵히 감내해야 했다.

소헌왕후는 1395년 9월, 청송 심씨 심온(沈溫)과 순흥 안씨의 딸로 경기 양주에서 태어났다. 조부 심덕부(沈德符)는 조선 건국에 기여한 공신이었고, 숙부 심종(沈淙)은 태조의 딸 경선공주와 혼인했다. 청송 심씨는 왕실과 긴밀한 관계를 맺은 명문가였다.

1408년(태종 8년), 14세의 나이에 두 살 연하인 태종의 셋째 아들 충녕대군과 혼인했다. 1418년 양녕대군이 폐위되고 충녕대군이 왕세자로 책봉되면서 그녀의 운명은 달라졌다. 그해 왕세자빈이 되었고, 세종이 즉위하면서 왕비의 자리에 올랐다. 하지만 세종의 즉위와 함께 그녀에게 시련이 닥쳐왔다.

소헌왕후의 아버지 심온은 세종 즉위 직후 영의정에 올랐다. 왕의 장인으로서 그에 걸맞은 예우를 받아야 한다는 태종의 뜻이 작용했다. 이어 심온은 세종의 즉위를 명나라에 알리고 승인을 받기 위한 사신으로 파견됐다.

세종 즉위 원년인 1418년, 이른바 ‘강상인의 옥사(獄事)’가 발생한다. 강상인은 병조참판으로, 태종이 상왕으로 물러난 뒤에도 군권을 장악하고 있던 시기에 군사 관련 업무를 세종에게만 보고했다는 이유로 문제가 됐다. 태종은 이를 자신의 권한을 무시한 행위로 받아들였다. 강상인과 관련자들은 혹독한 조사를 받았고, 사건은 점차 정치적 숙청의 양상으로 번졌다.

몇 달 뒤 태종은 사건을 다시 조사하도록 명했다. 재조사 과정에서 심온의 동생 심정 등이 상왕 태종의 군권 장악을 불평한 사실이 문제로 떠올랐다. 심온 역시 사건의 배후로 지목됐다. 명나라에서 귀국하던 심온은 체포돼 조사를 받았고, 결국 사사됐다.

태종은 외척의 정치적 영향력을 극도로 경계했다. 왕위에 오르는 과정에서 처남 민무구와 민무질을 비롯한 외척을 제거했던 전력도 있었다. 심온 사건 역시 왕권과 군권을 둘러싼 정치적 갈등 속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소헌왕후의 친정은 무너졌다. 아버지는 목숨을 잃었고, 어머니와 여동생 등 가족들은 노비로 전락하는 참화를 겪었다. 왕비의 친정이 하루아침에 역적의 가문으로 몰린 것이다.

친정의 몰락에도 불구하고 소헌왕후는 왕비로서 자신의 역할을 지켰다. 폐비가 된다면 친정의 회복마저 더욱 어려워질 수 있었기에 인내를 택했으리라고 짐작해 볼 수 있다. 다만, 그 내면의 판단을 직접 확인할 수 있는 기록은 제한적이다.

친정의 회복은 더디게 이루어졌다. 세종은 1426년 소헌왕후의 어머니 안씨와 가족에 대한 신분상의 조치를 바로잡았지만, 아버지 심온의 명예가 회복된 것은 문종이 즉위한 뒤였다. 소헌왕후는 남편이 왕으로 재위하는 동안에도 친정아버지의 억울함을 완전히 풀지 못한 채 살아야 했다.

그녀의 마음고생은 말년까지 이어졌다. 세자 시절 아들 문종의 첫 번째 세자빈 휘빈 김씨와 두 번째 세자빈 순빈 봉씨가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차례로 폐출됐다. 왕실의 후계 문제는 왕비에게도 큰 부담이었을 것이다.

1444년에는 친정어머니 안씨와 다섯째 아들 광평대군을 잃었다. 이듬해에는 일곱째 아들 평원대군마저 세상을 떠났다. 자녀를 앞세운 슬픔과 친정의 비극이 겹치면서 소헌왕후의 건강도 악화됐다. 결국 1446년(세종 28년), 52세의 나이로 둘째 아들 수양대군의 사저에서 세상을 떠났다.

[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성군 세종의 빛에 가려진 소헌왕후, 세종과 소헌왕후의 여주 영릉
[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성군 세종의 빛에 가려진 소헌왕후, 세종과 소헌왕후의 여주 영릉

소헌왕후는 아버지 태종의 능인 경기도 광주(당시 지명)의 헌릉(獻陵) 서쪽에 안장됐다. 세종은 훗날 자신도 왕비 곁에 묻힐 수 있도록 능을 조성했다.

세종은 왕비의 명복을 빌기 위해 불교 경전을 한글로 옮기는 작업을 추진했다. 수양대군이 중심이 돼 부처의 일대기를 담은 『석보상절(釋譜詳節)』을 편찬했고, 세종은 이를 바탕으로 석가의 공덕을 찬송하는 노래인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을 지었다. ‘달이 천 개의 강을 비춘다’는 뜻을 담은 이름이다. 왕비를 잃은 슬픔을 불경 편찬과 한글 문학으로 기린 셈이다.

소헌왕후는 세종과의 사이에서 8남 2녀를 두었다. 문종, 세조, 안평대군, 임영대군, 광평대군, 금성대군, 평원대군, 영응대군이 여덟 아들이며, 정소공주와 정의공주가 두 딸이다.

그러나 세종 사후 왕실에는 비극이 이어졌다. 장남 문종은 39세에 세상을 떠났고, 문종의 아들 단종은 숙부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긴 뒤 사사됐다. 세조의 맏아들 의경세자는 요절했으며, 예종(세조의 둘째 아들)의 장남 인성대군도 두 살에 세상을 떠났다. 소헌왕후가 살아서 지켜보았던 왕실의 불안과 슬픔은 그녀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끝나지 않았다.

[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성군 세종의 빛에 가려진 소헌왕후, 세종과 소헌왕후의 여주 영릉
[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성군 세종의 빛에 가려진 소헌왕후, 세종과 소헌왕후의 여주 영릉

세조는 아버지 세종의 능을 옮겨 왕실의 불행을 막으려 했다. 그러나, 뜻을 이루지 못했고, 아들 예종 때인 1469년에 이르러 세종과 소헌왕후의 영릉(英陵)은 여주로 천장됐다. 조선 왕실 최초의 능 이장이었다.

여주에 자리 잡은 영릉은 단종의 장릉을 제외하면 서울에서 가장 먼 조선 왕릉 가운데 하나다. 영릉(英陵)은 조선 왕릉 최초의 합장릉이다. 영릉의 봉분 앞에 섰을 때 왼쪽에 세종, 오른쪽에 소헌왕후가 모셔져 있다. 합장릉임을 나타내기 위해 혼유석(魂遊石)은 두 개 놓였다. 혼유석은 능의 주인이 혼령으로 나와 머무는 곳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천장 과정에서 능 내부의 구조에도 변화가 있었다. 석실에서 회격실로 바뀌었다. 조선 초기 왕릉은 돌로 묘실을 만드는 석실이 일반적이었으나, 세조의 광릉(光陵, 현재 경기도 남양주) 이후에는 관을 구덩이에 안치하고 그 주변을 석회와 흙으로 다져 메우는 회격실 방식이 채택됐다. 왕릉의 구조에도 시대에 따른 변화가 반영된 것이다.

소헌왕후는 흔히 성군(聖君)의 현모양처라고 불린다. 하지만 이는 어쩌면 지극히 가부장적인 관점에서 내린 평가일지 모른다. 그녀는 시아버지에 의해 친정이 무너지는 것을 지켜봐야 했고, 자녀들을 차례로 잃는 슬픔도 겪었다.

세종의 업적은 그의 능력과 노력으로 이루어진 것이지만, 그가 왕으로서 자신의 역할에 집중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왕비 소헌왕후의 내조와 감내가 있었을 것이다. 세종이 최고의 성군으로 기록될 수 있었던 것은 소헌왕후의 한없는 희생 덕분은 아니었을까.

조수진 전 국회의원
조수진 전 국회의원

글 : 조수진 전 국회의원
- 제21대 국회의원(전 양천갑 당협위원장)
- 국민의힘 수석최고위원, 최고위원
- 제21대 국회 법제사법, 국회운영위원
- 동아일보 정치부 기자, 논설위원
- 채널A '직언직설' 앵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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