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고구려·백제·신라 삼국의 각축지, ‘물의 도시’ 충주

기획·특집 | 조수진  기자 |입력

남한강 수운과 철 생산을 바탕으로 삼국이 다툰 전략적 요충지 탄금대·중앙탑·고구려비·장미산성에 남은 역사의 흔적 목계나루에서 되짚는 물길과 충주의 번성

[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고구려·백제·신라 삼국의 각축지, ‘물의 도시’ 충주
[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고구려·백제·신라 삼국의 각축지, ‘물의 도시’ 충주

얼마 전 장미산성에서 백제시대의 대규모 목조 저수시설이 발견됐다는 기사를 읽었다. 오래전부터 답사하고 싶었던 충주였다. 기사를 읽고 바로 답사 계획을 세웠다. 새벽 5시 집을 나섰다.

충주는 남한강 수로와 조령(문경새재)의 육로가 지나는 교통과 군사의 요충지였다. 5세기를 전후해 동남쪽으로 세력을 확장한 백제와 남진한 고구려, 북진한 신라가 치열한 각축전을 벌인 곳이 충주다.

백제가 먼저 이 지역을 차지했고, 이후 고구려와 신라가 차례로 지배했다. 한반도에 남아 있는 유일한 고구려비는 충주가 얼마나 중요한 곳이었는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증거다.

삼국의 경쟁과 재편을 거친 충주는 통일신라 때 중원(中原)으로 불렸다. 통일신라의 대문장가 강수(强首), 명필 김생(金生), 병자호란 때 활약한 임경업(林慶業) 장군 등을 배출했다. 을미의병 때는 충주성 전투가 의병 항쟁 확산의 중요한 계기가 되기도 했다.

1. 탄금대

탄금대부터 찾았다. 남한강과 달천이 합류하는 지점에 자리 잡아 경관이 수려하다.

가야 사람 우륵(于勒)은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가야금을 가지고 신라에 귀화했다. 그가 커다란 바위에 앉아 가야금을 타니 그 소리에 사람들이 모여 마을을 이루었다고 해서 탄금대라 불렀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신라 진흥왕은 우륵을 신라 땅인 충주에 머물게 했다고 한다. 풍류와 함께 나라를 잃은 객의 설움이 동시에 느껴진다.

탄금대는 임진왜란 당시 삼도도순변사(三道都巡邊使) 신립(申砬) 장군이 배수진을 치고 왜군에 맞서 싸우다 패한 전적지이기도 하다. 입구 가까운 곳에 충혼탑과 팔천고혼(八千孤魂)위령탑이 나란히 하늘로 솟아 있다.

충혼탑은 광복 이후 6·25전쟁에 이르기까지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전국의 충혼탑 가운데 가장 먼저 건립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팔천고혼위령탑은 1592년 4월 신립 장군과 함께 이곳에서 전사한 병사들의 넋을 기리기 위한 것이다. ‘팔천고혼’의 8000은 신립 장군이 왜군의 북상을 막기 위해 충주로 이동하면서 한양에서부터 거느린 병사들의 규모를 가리킨다.

가슴 아픈 역사와는 달리 탄금대가 있는 대문산은 산세가 평탄하고 송림이 우거져 마음이 상쾌해진다. 어느덧 탁 트인 남한강이 눈앞에 펼쳐진다. 탄금정에 오르니 우륵의 가야금 연주가 들리는 듯하다.

탄금대 북쪽 남한강 언덕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열두대라고 하는 아찔한 절벽이 있다. 기암절벽을 따라 강물이 휘감아 돈다.

신립 장군이 전투를 독려하기 위해, 혹은 달아오른 활시위를 강물에 식히기 위해 암벽을 열두 번이나 오르내렸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다급했던 전투 상황이 연상되는 곳이다.

열두대로 내려가는 계단 오른쪽에는 신립 장군이 순절한 곳임을 알리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 신립 장군은 8000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왜장 가토 기요마사와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왜군과 싸우다 전사했다.

역사는 대개 승자의 기록, 패장을 대하는 마음이 애잔하다. 지금 열두대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더없이 고요하고 평화롭다. 유속이 느려진 강 한가운데 자리한 용섬은 푸르름이 짙다. 산책로는 탄금대공원을 한 바퀴 돌 수 있도록 연결돼 있다.

[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고구려·백제·신라 삼국의 각축지, ‘물의 도시’ 충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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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중앙탑

중앙탑으로 이동한다. 탄금대에서 남한강 하류 쪽으로 약 6km 떨어져 있다. 산중이 아니라 탁 트인 강변에 자리 잡고 있어 이색적이다.

중앙탑은 높이에 비해 폭이 좁아 날렵한 모양새다. 현존하는 통일신라시대 석탑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크다. '중앙’이라는 이름에는 통일신라의 영토 가운데에 해당하는 곳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이 일대에서는 여러 차례 발굴 조사가 이뤄졌지만, 탑과 직접 관련된 사찰 유적은 확인되지 않았다. 일반적인 사찰의 불탑과는 달리 기복적 성격을 지녔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그래서인지 중앙탑을 돌며 소원을 비는 사람들이 눈에 띈다.

중앙탑 앞 강변의 그네에 잠시 앉아 주변을 바라본다. 충북은 바다가 없는데, 충북의 충주는 사방이 물이다. 충주호와 탄금호가 있고, 충주시청을 기준으로 남쪽에는 달천이, 서쪽에는 요도천이 흐른다. 남한강은 동쪽에서 북쪽으로 이어져 흐른다. ‘물의 도시’임을 실감한다.

[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고구려·백제·신라 삼국의 각축지, ‘물의 도시’ 충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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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충주시립박물관

중앙탑 바로 앞에는 충주시립박물관이 있다. 미리 예약해 놓은 해설을 듣는다.

충주는 한반도의 대표적인 철 생산지였다. 현재의 경기와 영남을 잇는 교통의 요지이고, 배가 다닐 수 있는 남한강이 흐르며, 농기구와 무기를 만드는 데 중요한 철 생산량도 많았으니 삼국이 쟁탈전을 벌일 만하다.

박물관에서 관련 유물과 해설을 접하면 현장에서 미처 알지 못했던 사실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4. 고구려비전시관

고구려비전시관으로 이동한다. ‘입석마을’이라는 글씨가 눈에 들어온다. 전시관은 충주고구려비가 발견된 입석마을에 있다. ‘입석(立石)’이라는 이름에서 보듯 오래전부터 마을에 돌이 서 있었지만, 그 정체를 알지 못해 대장간의 기둥으로 쓰이기도 했다고 한다.

고구려비는 네 개의 면에 글씨가 새겨져 있다. 한 개 면에만 글씨가 새겨진 단양 신라 적성비와는 확연히 다르다.

크기는 다르지만 사진으로 봤던 광개토대왕비의 형태가 떠오른다. 고구려비로 확인된 것은 1979년 4월이다. 충주 지역 문화예술 애호가들의 모임인 예성문화연구회 회원들이 유적과 유물을 답사하던 중 돌에 새겨진 희미한 글자를 확인했다. 이후 단국대 학술조사단의 조사와 학계 보고를 거쳐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충주고구려비는 이 땅에 남아 있는 유일한 고구려비라는 중요성과 더불어 당시 고구려의 정치와 외교에 관한 여러 정보를 제공한다. 무엇보다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를 엿볼 수 있게 한다.

비문에서 큰 관심을 끈 표현은 ‘新羅土內幢主(신라토내당주)’다. 이는 신라 영토 안에 고구려의 군대나 관리가 주둔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단서다. 당시 신라가 고구려의 강한 영향력 아래 놓여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비문에는 두 나라의 관계를 ‘여형여제(如兄如弟)’, 즉 형과 아우의 관계로 표현한 내용도 나온다. 고구려 왕은 ‘태왕’으로, 신라 왕은 ‘매금’으로 불렸으며, 신라를 ‘동이(東夷)’라고 표현한 대목에서도 고구려 중심의 세계관을 엿볼 수 있다. 두 나라의 관계를 형제 사이로 표현했지만, 고구려의 우위를 드러내는 인식이 함께 담겨 있다.

[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고구려·백제·신라 삼국의 각축지, ‘물의 도시’ 충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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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장미산성

충주고구려비전시관에서 뒤쪽으로 9분쯤 가면 장미산성이 나온다. 삼국의 각축장이었던 긴장의 공간에 꽃 이름인 ‘장미(薔薇)’가 붙어 흥미로웠는데, 산자락이 길게 뻗은 모습에서 유래해 ‘긴 장(長)’에 ‘꼬리 미(尾)’를 써서 장미산(長尾山)이라 불렀다는 것이다.

시멘트 도로를 따라 차를 몰고 산 정상 바로 아래 성벽까지 죽 올라간다. 내가 가본 산성 가운데 가장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곳이었다. 발굴작업이 한창이어서 길이 잘 돼 있다.

험준한 바위산은 아니지만, 경사를 이용해 성을 쌓았다. 해발 337m의 산 위에 2.9km의 성곽이 빙 둘러쳐 있다.

산성에 오르니 남한강과 충주 일대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이곳이 왜 삼국의 각축장이 됐는지 풍경만으로도 짐작할 수 있다. 장미산성은 한성백제 시기에 축조된 뒤 고구려와 신라가 차례로 점유했을 가능성이 높다.

[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고구려·백제·신라 삼국의 각축지, ‘물의 도시’ 충주
[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고구려·백제·신라 삼국의 각축지, ‘물의 도시’ 충주

6. 목계나루

장미산성에서 약 1km 떨어진 곳에 목계나루가 있다. 구한말까지 방물장수와 장돌뱅이들로 시끌벅적하던 장터였다.

마포에서 남한강을 거슬러 올라온 소금 장수의 돛단배와 정선 아우라지에서 목재를 가득 실은 뗏목이 정박하던 내륙의 큰 항구이기도 했다. 이곳에서 한강 하류의 노량진과 마포까지 배로 사흘이 걸렸다고 한다.

강은 사람과 물자가 오가고 지역과 지역을 연결하는 길이었다. 충주가 오랫동안 교통과 군사의 요충지로 기능할 수 있었던 이유도 남한강이라는 물길과 무관하지 않다.

1789년(정조 13) 작성된 『호구총수(戶口總數)』는 전국 각 지역의 호구 현황을 기록하고 있다. 한성의 인구가 18만 9153명으로 가장 많았고, 평양 10만 7592명, 의주 8만 9970명, 충주 8만 7,331명 등의 순서다. 충주가 남한강 수운을 바탕으로 번성했던 배경을 생각하면 조선 후기에도 중요한 지역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탄금대에서 신립 장군의 비극을 돌아보고, 중앙탑에서 통일신라의 흔적을 만났다. 고구려비 앞에서는 삼국의 역학 관계를 살폈고, 장미산성에서는 남한강을 차지하기 위한 경쟁을 실감했다. 마지막으로 목계나루에서 강을 따라 번성했던 사람들의 삶을 떠올렸다.

충주는 한 시대의 역사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도시다. 삼국의 각축장이었고, 통일신라의 중원이었으며, 남한강 수운을 통해 사람과 물자가 모여들던 곳이었다.

강은 지금도 묵묵히 흐른다. 그 물길을 따라 충주의 오랜 역사가 겹겹이 흐르고 있다.

조수진 전 국회의원
조수진 전 국회의원

글 : 조수진 전 국회의원
- 제21대 국회의원(전 양천갑 당협위원장)
- 국민의힘 수석최고위원, 최고위원
- 제21대 국회 법제사법, 국회운영위원
- 동아일보 정치부 기자, 논설위원
- 채널A '직언직설' 앵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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