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폐비 윤씨의 회묘...묘에서 왕비의 능으로, 그리고 다시 묘가 되기까지

기획·특집 | 조수진  기자 |입력

성종의 왕비에서 폐비로, 사사된 뒤에도 이어진 윤씨의 굴곡진 운명 연산군의 추숭으로 회릉이 됐다가 중종반정 이후 다시 회묘로 격하 왕실의 권력 다툼이 바꾼 한 여인의 지위와 무덤, 서삼릉에 남은 역사의 흔적

[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폐비 윤씨의 회묘...묘에서 왕비의 능으로, 그리고 다시 묘가 되기까지
[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폐비 윤씨의 회묘...묘에서 왕비의 능으로, 그리고 다시 묘가 되기까지

경기도 고양의 서삼릉(西三陵)에는 중종(中宗)의 계비 장경왕후(章敬王后)의 희릉(禧陵), 장경왕후의 아들인 인종(仁宗)과 인성왕후(仁聖王后)의 효릉(孝陵), 철종(哲宗)과 철인왕후(哲仁王后)의 예릉(睿陵)이 있다. 한양의 서쪽에 자리한 세 능이어서 서삼릉이라 불린다.

서삼릉의 능역은 원래 137만 평에 이르렀으나, 1960년대 이후 젖소개량사업소와 말 목장, 골프장 등이 들어서면서 크게 축소됐다. 현재 능역으로 남은 면적은 6만6000평 정도다. 효릉과 태실(胎室), 후궁 묘역 등은 희릉·예릉이 있는 곳에서 2km가량 떨어져 있고, 별도의 출입구를 이용해야 한다.

후궁 묘역 인근에는 왕비의 자리에 올랐으나 남편에 의해 폐출되고 끝내 사사(賜死)된 한 여인의 무덤이 있다. 성종(成宗)의 비이자 연산군(燕山君)의 생모인 폐비 윤씨(1455~1482)의 회묘(懷墓)다.

윤씨는 사약을 받고 세상을 떠난 뒤 경기도 장단에 묻혔다. 비천한 신분으로 격하된 채 묻혔던 어머니의 무덤은 아들 연산군이 왕위에 오른 뒤 달라졌다. 연산군은 1504년 어머니를 제헌왕후(齊獻王后)로 추숭하고, 묘를 회릉(懷陵)으로 격상했다. 왕비의 지위와 능호를 되찾아 준 것이다.

그러나 그해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연산군이 폐위되면서 제헌왕후라는 시호도 삭탈됐다. 회릉 역시 다시 회묘로 격하됐다. 회묘는 이후 서울 동대문구 회기동 일대에 자리하다가 1969년 10월 서삼릉 경내로 옮겨졌다. 경희의료원 조성 등으로 원래의 자리를 지킬 수 없게 된 것이다.

[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폐비 윤씨의 회묘...묘에서 왕비의 능으로, 그리고 다시 묘가 되기까지
[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폐비 윤씨의 회묘...묘에서 왕비의 능으로, 그리고 다시 묘가 되기까지

오늘날 회묘는 왕의 무덤인 능이 아니라 일반 묘의 지위를 갖는다. 하지만 한때 회릉으로 조성됐던 시절의 석물과 배치가 남아 있어 능에 견줄 만한 규모와 위엄을 보여준다. 회묘는 서삼릉 태실 권역에 포함돼 있어 해당 구역의 관람을 예약하면 함께 둘러볼 수 있다.

폐비 윤씨의 삶은 짧았지만 극적이었다.

윤씨는 한명회(韓明澮)의 딸인 공혜왕후(恭惠王后, 1456~1474)가 세상을 떠난 뒤인 1476년 성종의 계비로 왕비의 자리에 올랐다. 후궁이 된 지 약 3년 만이었다. 그해 11월에는 훗날 연산군이 되는 왕자를 낳았다. 왕비가 된 지 석 달여 만이었다.

그러나 왕비의 자리는 오래가지 못했다. 윤씨는 성종의 총애를 받는 후궁들과 불화를 빚었고, 궁중에서는 윤씨의 투기와 처신을 둘러싼 논란이 거듭됐다. 1477년에는 윤씨의 처소에서 주술과 관련된 물건 등이 발견되면서 폐비 논의가 불거졌다. 왕세자의 생모라는 점 등을 고려해 폐출이 유보됐지만, 갈등은 끝내 해소되지 않았다.

1479년, 성종은 윤씨를 왕비의 자리에서 내쫓았다. 윤씨의 투기와 왕에 대한 불경 등이 폐출의 명분이 됐다.

왕의 얼굴에 손톱자국을 냈다는 이야기가 널리 알려져 있지만, 이 일화는 실록의 기록과 구분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폐비 과정은 왕실 내부의 갈등과 당시의 정치적 판단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폐출된 윤씨는 1482년 사사됐다. 스물일곱 살이었다.

윤씨의 죽음과 관련해서는 훗날 연산군이 어머니의 피 묻은 적삼을 보고 원한을 품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날 때 친정어머니에게 피 묻은 적삼을 보관했다가 세자가 왕이 되면 전해 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 일화는 연산군의 폭정과 갑자사화(甲子士禍)를 설명할 때 자주 등장하지만, 이 역시 구체적인 전승의 내용과 역사적 사실을 구분해 읽을 필요가 있다.

[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폐비 윤씨의 회묘...묘에서 왕비의 능으로, 그리고 다시 묘가 되기까지
[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폐비 윤씨의 회묘...묘에서 왕비의 능으로, 그리고 다시 묘가 되기까지

성종은 1494년 세상을 떠났다. 그 뒤 왕위에 오른 연산군은 생모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물어 관련 인사들을 처벌하기 시작했다. 1504년 갑자사화가 일어나면서 폐비 윤씨의 죽음에 관여했거나 관련된 것으로 지목된 인물들이 대거 희생됐다. 어머니의 원한을 풀겠다는 명분은 대규모 숙청으로 이어졌다.

숙청은 죽은 자들에게까지 이어졌다. 이미 세상을 떠난 한명회도 무덤이 파헤쳐져 부관참시를 당했다.

폭정이 거듭되면서 그는 결국 중종반정으로 왕위에서 쫓겨났다. 어머니의 무덤이 능으로 격상된 것도, 다시 묘로 격하된 것도 모두 아들의 정치적 운명과 맞물려 있었다.

폐비 윤씨의 이야기는 왕비의 지위가 한 개인의 삶을 얼마나 극적으로 바꿀 수 있었는지 보여준다. 왕비로 책봉돼 왕세자를 낳았지만, 폐출된 뒤 사약을 받았고, 죽은 후에도 왕비와 폐비의 지위를 오가며 무덤의 격이 달라졌다. 회묘에 남아 있는 능과 같은 석물은 그 굴곡진 역사의 흔적이다.

서울 동대문구의 회기동(回基洞)이라는 지명은 이 무덤과 관련이 있다. 회묘(懷墓)가 자리했던 터라는 뜻에서 비롯됐다는 것이다. 일제가 1914년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쓰기 어려운 ‘품을 회(懷)’ 대신 ‘돌 회(回)’로 바꾸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남편인 성종의 명으로 사사되어 묘에 묻혔다가, 아들 연산군의 권력으로 능이 되었고, 다시 아들의 몰락과 함께 묘로 돌아왔으니, 공교롭게도 회묘(懷墓)는 이름 그대로 회묘(回墓)가 된 셈이다.

서삼릉 한편에 자리한 회묘(懷墓).

20대 여인은 남편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싶었던 것뿐이었다.

그것이 그토록 큰 죄였을까.

조수진 전 국회의원
조수진 전 국회의원

글 : 조수진 전 국회의원
- 제21대 국회의원(전 양천갑 당협위원장)
- 국민의힘 수석최고위원, 최고위원
- 제21대 국회 법제사법, 국회운영위원
- 동아일보 정치부 기자, 논설위원
- 채널A '직언직설' 앵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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