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정조(正祖)의 꿈, 개혁 의지가 담긴 수원화성(水原華城) 성곽길

기획·특집 | 조수진  기자 |입력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를 향한 효심에서 출발한 수원화성…백성을 위한 이상도시 건설로 이어진 구상 정약용의 설계와 거중기 등 당대 기술이 집약된 성곽…방어시설과 건축미가 공존하는 조선 후기의 걸작 성곽길 곳곳에 남은 정조의 개혁 의지…상업과 농업을 함께 발전시키려 했던 새로운 도시의 꿈

[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정조의 꿈, 개혁 의지가 담긴 수원화성 성곽길
[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정조의 꿈, 개혁 의지가 담긴 수원화성 성곽길

조선시대 수원부의 원래 읍치(邑治·고을 소재지)는 지금의 화성시 화산(花山, 해발 108m) 일대였다.

정조(正祖, 1752~1800)가 1789년 양주군 배봉산(현재 서울시립대학교 뒷산)에 있던 아버지 사도세자(思悼世子, 1735~1762)의 묘(墓)를 화산으로 옮기면서 화산 아래 있던 수원의 읍치는 현재의 수원 팔달산(八達山) 아래로 옮겨졌다.

정조는 팔달산 아래 새 읍치를 화성(華城)이라 했다.

정조는 장자(莊子)의 화인축성(華人祝聖) 고사를 떠올렸다. 중국의 요(堯) 임금이 화(華)지방을 순찰할 때 화(華)의 제후가 장수(長壽), 부귀(富貴), 다남자(多男子)를 축원(祝願)했다는 내용이다.

정조는 '백성은 왕실(王室)의 안녕(安寧)을, 임금은 백성의 번영(繁榮)을 기원하는 '여민동락'(與民同樂)의 의미로 화성(華城)이라고 이름 붙였다.

정조는 신하들에게 '화(花)'자와 '화(華)'자는 통용(通用)된다고 했다. 요(堯)임금 시대와 같은 태평성대(太平聖代)를 이루고자 하는 바람을 수원화성에서 이루고자 한 것이다.

1794년(정조 18년) 봄, 본격적인 화성 건설에 착수해 2년 6개월 만인 1796년(정조 20년) 가을 신도시를 완성한다.

정조는 세자(순조)가 15세 되는 1804년에 왕위를 물려준 뒤 어머니를 모시고 신도시로 옮겨와 살고자 했다. 그러나 정조는 1800년 급서(急逝)했다.

수원화성은 지하철 1호선 수원역에서 차로 10분 거리다. 차를 이용할 때는 화성행궁에 주차하고 걷는 것이 좋다. 수원화성은 동쪽은 평지를 이루고, 서쪽은 팔달산에 걸쳐 있는 형태다. 둘레 5.4㎞의 성곽길이 잘 연결돼 있어 반나절이면 둘러볼 수 있다.

성곽 위도 걷기 좋고 안이나 바깥도 걷기 좋다. 어디서든 진입과 진출이 가능한 것도 수원화성의 매력이다. 북수문(北水門·화홍문)~장안문(長安門)~서북공심돈(西北空心墩)~화서문(華西門) 구간만 걸어보는 것도 좋다.

이 구간은 경사(傾斜)가 없고, 왕복 50분 정도여서 수원에 갈 때면 걷곤 한다.

[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정조의 꿈, 개혁 의지가 담긴 수원화성 성곽길
[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정조의 꿈, 개혁 의지가 담긴 수원화성 성곽길

수원천(水原川) 위에 걸터앉은 화홍문(華虹門)에서 시작한다.

화홍문은 화성의 북수문(北水門)으로, 일곱 개의 홍예(虹霓)가 성으로 흘러드는 물길을 가지런히 나눈다. 7개 수문의 크기가 다른 게 특징이다. 가운데 수문이 좌우보다 넓고 크게 설치돼 수량을 효과적으로 조절할 수 있다.

물이 들어차면 홍예 아래로 쏟아지는 물보라가 흰 비단처럼 펼쳐지는데, 이 모습을 일컫는 ‘화홍관창(華虹觀漲)’은 수원팔경(水原八景) 가운데 하나로 꼽혔다.

[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정조의 꿈, 개혁 의지가 담긴 수원화성 성곽길
[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정조의 꿈, 개혁 의지가 담긴 수원화성 성곽길

화홍문 옆 언덕을 오르면 동북각루(東北角樓)를 만난다. 견고한 석축 위에 단아한 문루가 올라앉은 모습은 방어시설에도 아름다움을 놓치지 않았던 수원화성의 미적 감각을 보여준다.

정자의 별칭은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이다. 정조는 방화수류정의 ‘화’와 ‘류’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陵)이 자리한 화산과 새롭게 조성한 수원 읍치의 유천(柳川)을 가리킨다고 풀이했다.

방화수류정에는 온돌방 한 칸이 있다. 보통 군사들의 휴식을 위해 각루 1층에 온돌방을 만들었는데, 방화수류정은 왕을 위해 2층에 온돌방을 만들고 창문을 냈다. 실용과 풍류를 함께 고려한 것이다.

그 시선을 따라 누각 아래를 내려다보면 1796년 조성된 연못 용연(龍淵)이 펼쳐진다. 화성 축성 과정에서 조성됐다. 가운데 작은 섬을 둔 전통 연못의 구성이 방화수류정, 버드나무와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을 완성한다.

방화수류정을 바라봤을 때 왼쪽으로 성곽 아래 평지를 걷는다. 수원화성의 외곽을 살펴보기 위해서다.

수원화성의 성벽 높이는 4~6m이다. 4개의 대문과 공심돈(空心墩) 등의 각종 공격·방어시설, 포루(砲樓) 등 49개의 시설물로 구성돼 있다.

실학자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이 설계하고, 재상을 지낸 채제공(蔡濟恭, 1720~1799)이 총괄 지휘했다. 거중기(擧重機), 녹로(轆轤), 유형거 등 당시 최첨단의 건설 장비를 사용했다. 조선의 모든 기술과 역량이 총집결된 공사였다.

[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정조의 꿈, 개혁 의지가 담긴 수원화성 성곽길
[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정조의 꿈, 개혁 의지가 담긴 수원화성 성곽길

성곽을 따라 난 산책로는 아름답고, 호젓하다.

곧 장안문(長安門)에 도착한다. 장안문은 수원화성의 북문(北門)이면서도 정조가 수원에 들어올 때 이용한 문으로, 거대한 홍예문과 2층 문루, 이를 둥글게 감싼 옹성(甕城)이 한꺼번에 시야에 들어온다.

정조는 장안(長安)의 의미를 ‘북쪽으로 한양의 궁궐을 바라보고, 남쪽으로 현륭(융릉)을 바라보며 만년의 편안함을 길이 알린다'고 풀이했다.

문 밖에 항아리 모양의 옹성(甕城)을 만들고 방어를 위해 좌우에 적대(敵臺)를 세웠다. 성문 양쪽에는 포루(砲樓)를 만들고, 당시 최대·최강의 대포인 홍이포(紅夷砲)를 배치했다.

중국인들은 네덜란드인들을 ‘홍이’라 불렀는데, 그들의 대포를 모방해 만든 중국식 화포가 홍이포다. 모형이지만, 크기만 봐도 그 막강한 화력을 짐작케 한다.

장안문은 남문인 팔달문(八達門)과 더불어 화성에서 가장 웅장하고 높은 격식을 갖춘 건물이다. 2층의 누각은 네 모서리 추녀가 길게 경사를 이루면서 용마루와 만나는 우진각 지붕(지붕 모서리가 경사지게 내려오게 하는 것) 형태다.

길고 휘어진 목재를 구하기 힘든 조선시대에 우진각 지붕은 궁궐이나 도성의 정문과 같은 건물에만 쓰였다. 문루 처마 밑에는 다포(多包)라는 화려하고 정교하게 다듬은 받침 목재를 짜 맞췄다.

다포식 건물은 18세기 이후 궁궐에서도 거의 백 년 동안 짓지 않았기 때문에 특별히 강원도 출신의 승려 목수인 굉흡이 와서 건설을 도왔다.

서울의 숭례문(崇禮門), 흥인지문(興仁之門)과 함께 조선 시대 성문을 대표하던 장안문은 6·25전쟁 때 폭격으로 파괴돼 1975년 다시 복원했다.

화서문(華西門)을 향해 다시 걷는다.

화서문(華西門)은 수원 화성의 서문(西門)이다. ‘화성의 서쪽’이란 뜻이지만, 서쪽에는 팔달산이 있어 서북쪽에 문을 두었다.

문밖으로 넓은 평지가 펼쳐져 있어 주변을 감시하기 위해 높다란 서북공심돈(西北空心墩)을 함께 세웠다.

공심돈(空心墩)은 '속이 빈 돈대'라는 뜻으로, 우리나라 성곽 중 화성에서만 볼 수 있다. 보통 돈대는 성곽과 떨어진 높은 곳에 세워 적을 감시하는 시설이나, 서북공심돈은 서북쪽 성벽이 꺾이는 위치에 설치했다.

치성(雉城) 위에 벽돌로 3층의 망루를 세우고 꼭대기에는 단층의 누각을 올려 군사들이 감시할 수 있도록 하고, 외벽에는 화포를 쏠 수 있는 구멍을 뚫어 공격 기능까지 갖췄다.

정조 21년(1797년) 정월, 완성된 화성을 둘러보던 정조는 서북공심돈 앞에 멈춰 “우리나라 성곽에서 처음 지은 것이니 마음껏 구경하라.”며 매우 만족스러워 했다.

화성에는 모두 세 곳에 공심돈을 세웠는데 서북공심돈만이 축성 당시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정조의 꿈, 개혁 의지가 담긴 수원화성 성곽길
[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정조의 꿈, 개혁 의지가 담긴 수원화성 성곽길

장안문은 크고 위엄이 있고, 화서문은 전쟁을 겪고도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해서 보물로 지정돼 있다.

방화수류정으로 돌아올 때는 성곽 위를 걷는다. 천천히 걷다 보면 도로와 주택가 사이로 18세기의 성벽이 이어지는 수원만의 풍경을 만날 수 있다.

화성이 완공되자 정조는 백성들의 이주를 권했다. 수원으로 이주해온 거상들에게는 인삼 전매권을 부여했다. 이에 따라 상인들이 모여들고 한양의 종로처럼 시전이 들어서는 등 도시는 번창해갔다. 수원 시내 행궁 앞 도로가 ‘종로’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것도 이런 역사적 배경 때문이다.

정조는 상업과 함께 농업도 발전시켰다. 농민들을 위해 황무지를 개간해 농지를 만들어 주고, 둑을 막아 저수지를 조성하고, 농사지을 때 필요한 소까지 나눠주었다.

농촌진흥청(현재는 전주시로 이전), 서울대 농대 등이 이곳에 둥지를 틀었던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수원화성은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을 거치며 성곽과 시설이 부서지고 손실됐다. 1975년 ‘수원성 복원정화사업'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시작됐다. 장안문에서 화서문 사이 장안공원도 이때 조성됐다.

4년여간 중요 시설을 전면 복원하고, 성벽을 보수하고, 주변을 정비하는 작업이 이뤄졌다. 축성 당시 그림과 글로 설계도와 내용을 철저하게 남겨 놓은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 덕분에 원형에 가깝게 소실된 성을 복원할 수 있었다.

수원화성은 아버지 사도세자를 향한 정조의 애틋한 효심에서 출발했다. 그러나 정조가 꿈꾼 도시는 단순히 아버지의 묘를 모시기 위한 배후 도시가 아니었다. 백성이 편안하고 풍요롭게 살아가는 새로운 이상도시였다. 효심에서 시작된 일이 백성을 위한 개혁(改革)과 도시 건설로 이어진 것이다.

정조는 아버지를 향한 그리움을 품고 수원화성을 건설했지만, 그 꿈이 완성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오늘날 수원화성의 성곽길을 걷다 보면 200여 년 전 정조가 꿈꾸었던 나라와 백성의 삶이 무엇이었는지 되새기게 된다.

조수진 전 국회의원
조수진 전 국회의원

글 : 조수진 전 국회의원
- 제21대 국회의원(전 양천갑 당협위원장)
- 국민의힘 수석최고위원, 최고위원
- 제21대 국회 법제사법, 국회운영위원
- 동아일보 정치부 기자, 논설위원
- 채널A '직언직설' 앵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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