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유진의 조향산책] 오로라는 하늘을 치유하지 않는다

기획·특집 | 정유진  기자 |입력

조향사 안솔이 만든 향수
조향사 안솔이 만든 향수

오로라는 하늘을 치유하지 않는다. 다만, 이미 존재했던 빛을 드러낼 뿐이다.

“사막 한가운데서 오로라를 마주하는 듯한 향을 만들어주세요.”

얼마 전, 안무를 창작하는 한 예술가로부터 시그니처 향수를 의뢰받았습니다. 미팅 자리에서 그가 건넨 주문은 신선했고, 저를 활짝 웃게 했습니다.

보통의 의뢰인들이 흔히 말하는 ‘위로’, ‘안정’, ‘힐링’ 같은 단어는 단 한 마디도 섞여 있지 않았거든요. 대신 그는 극단적인 고요함 속에서만 마주할 수 있는 신비로운 감각에 대해 말했습니다. 추상적이지만, 조향사인 저에게는 이상할 만큼 현실적으로 다가온 표현이었습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오로라를, 그것도 척박한 사막 한가운데서 마주한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요? 그때의 공기는 어떤 향을 머금고 있을까요? 그 질문은 곧 제 버킷리스트가 되었습니다.

동시에 한 가지 깨달음을 주었죠. 어쩌면 사람들이 향에 기대하는 진정한 가치는 문제를 해결해 주는 마법이 아니라, ‘지금의 나’를 선명하게 인식하게 만드는 감각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언제부턴가 우리는 향에 너무 많은 숙제를 내줍니다. 지친 마음을 달래주고, 불안을 씻어주며, 엉망이 된 하루를 근사하게 바꿔주길 원하죠. 물론 “이 향을 맡으면 힐링이 돼요”라는 수강생들의 고백은 조향사인 저에게 가장 큰 보람이자 익숙한 칭찬입니다.

하지만 저는 ‘치유’라는 말 앞에서 늘 한 걸음 멈춰 섭니다. 향이 정말 우리를 치유할 수 있을까? 내가 누군가를 위로할 자격이 있는 사람일까?

조향 수업을 하다 보면 간혹 “오늘따라 이 향이 너무 무겁게 느껴져요”라고 말하는 학생이 있습니다. 그럴 때 저는 향료를 바꾸기보다 먼저 이렇게 묻습니다. “오늘 하루는 어땠나요?”

향이 변한 것이 아닙니다. 그 향을 받아들이는 그날의 몸과 마음이 평소와 달라졌을 뿐이죠. 향의 무게감을 탓하기 전에, 마음속에 어떤 돌덩이가 들어와 있는지 조심스럽게 살펴보는 과정이 먼저여야 합니다.

조향사로서 마주하는 한 가지 분명한 진실이 있습니다. 향은 처음 코끝을 스칠 때보다, 시간이 흐른 뒤 살결에 남았을 때 더 솔직해진다는 점입니다.

첫인상을 결정하는 탑 노트(Top note)는 화려하지만 금방 사라집니다. 하지만 우리의 감정과 반응을 끝까지 붙들고 있는 것은 서서히 올라오는 잔향(Base note)입니다. 그날의 컨디션과 감정은 바로 이 잔향에 가장 예민하고 정직하게 반응합니다.

결국 향은 오로라와 같습니다. 오로라가 밤하늘의 상처를 치료해주지는 않지만, 어둠 속에 숨어 있던 하늘의 빛을 가장 아름답게 드러내 주듯이 말입니다. 향은 해결사가 아닙니다. 오히려 통로에 가깝습니다. ‘괜찮다’고 덮어두었던 피로, 애써 외면했던 내밀한 마음 상태로 우리를 안내하는 아주 빠르고 직관적인 길입니다.

만약 어떤 날 맡은 향이 유독 달콤한 위로로 다가온다면, ‘아, 지금 내 상태가 향을 기쁘게 받아들일 만큼 여유롭구나’ 혹은 ‘내가 이만큼의 온기를 갈구하고 있구나’라고 스스로를 체감해 보세요.

오로라가 늘 밤하늘을 채우지 않듯, 향도 매번 같은 감각을 선물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어둡고 고요한 순간에 비로소 빛이 또렷해지듯, 향은 우리가 멈춰 선 그 지점에서 가장 선명한 신호를 보냅니다.

그래서 저는 단순히 ‘예쁜 향’을 만들려 하지 않습니다. 대신 이 향이 어떤 순간에 열릴지, 어떤 감정의 문고리를 건드릴지 고민합니다. 사람들이 제 향을 통해 잠시 숨을 고르고, 자신을 마주하는 공간을 갖길 바랍니다.

향이 나를 바꿔주길 기대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향은 이미 충분히 제 역할을 하고 있으니까요. 지금 당신의 몸과 마음이 보내는 가장 정확한 신호, 향은 치유가 아니라 당신을 돌아보게 하는 세상에서 가장 빠른 감각입니다.

감정을 향으로 번역하는 조향사, 안솔

글 : 정유진 (조향사 안솔) @ansol.scent
- ‘Pilates & Scent’ 웰니스 프로그램 운영
- 향 제품 제작 · 판매
- 페레(PERE) 협업 및 제품 협찬
- 교회 향 프로젝트 협업
- 브랜드·공간 향 개발 & 클래스 기획

×

관련기사

댓글 (0)

아직 댓글이 없습니다.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댓글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