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태종은 왜 효령을 건너뛰었을까-청권사(淸權祠)에서

기획·특집 | 조수진  기자 |입력

양녕대군 폐세자 뒤 왕위 계승에서 제외된 효령대군 《태종실록》에 담긴 충녕대군의 세자 책봉 이유 왕위를 잇지 못한 효령대군, 왕실의 어른으로 남다

[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태종은 왜 효령을 건너뛰었을까-청권사에서
[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태종은 왜 효령을 건너뛰었을까-청권사에서

세종의 둘째 형 효령대군(孝寧大君, 1396~1486)은 불심이 깊었다. 조선의 숭유억불 정책 아래서도 여러 불사를 주도했다. 1465년 원각사(圓覺寺, 현재 탑골공원 터)의 원각사지십층석탑과 범종을 조성할 때 도제조로 참여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효령대군의 이름은 보(補)였다. 태종 18년(1418년) 양녕대군이 세자에서 폐위되자 자신이 세자로 책봉될 것이라고 내심 기대했다. 그러나 태종의 마음이 동생 충녕대군에게 있다는 것을 알고 단념했다.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는 이런 이야기가 전해진다.

첫째인 양녕대군이 폐세자가 되면 둘째인 효령대군이 왕위를 이을 순서였다. 효령대군은 그 점을 염두에 두고 열심히 공부했는데, 양녕대군이 찾아와 효령대군을 걷어찼다.

“어리석다. 아버지의 뜻이 충녕에게 있음을 어찌 깨닫지 못하느냐.”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한 효령대군은 절로 달려가 북을 두들겼다. 온종일 북을 두들겨 가죽이 부풀어 늘어졌다고 한다.

서울 서초구 방배동에 있는 청권사(淸權祠)는 효령대군의 사당이자 묘역으로, 가을에 찾기 좋은 곳이다. 지하철 2호선 방배역 4번 출구를 나오면 바로 청권사다. 지하철역 앞 대로 이름도 효령대군에서 따온 효령로다.

청권사는 양녕대군의 사당인 지덕사처럼 개방되어 있지만, 사당 내부는 특별한 때에만 관람할 수 있다. 서초구청은 매년 가을 청권사 해설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태종은 왜 효령을 건너뛰었을까-청권사에서
[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태종은 왜 효령을 건너뛰었을까-청권사에서

청권사는 계단 위 높은 곳에 자리 잡고 있다. 청권(淸權)은 중국 주나라의 태백(太伯)과 우중(虞仲)의 고사에서 유래했다.

주나라 태왕은 셋째 아들 계력(季歷)에게 왕위를 물려주려 했다. 이를 알아챈 맏아들 태백과 둘째 아들 우중은 왕위를 사양하고 은거했다. 공자는 태백의 덕을 지극히 높이 평가(지덕)했고, 우중의 처신은 청권(淸權)에 부합한다고 보았다. 청권사는 이 고사에 빗대어 이름 지은 사당이다.

효령대군과 부인 해주 정씨의 묘는 봉분이 구분된 쌍묘이다. 앞에는 상석과 문인석 등이 있어 작은 왕릉처럼 위엄과 품위가 느껴진다.

부인 해주 정씨는 조선 초 문신 정역(鄭易)의 딸이었다. 정역은 집현전 대제학을 지냈으며, 태종 이방원과 고려 말 과거에 함께 급제한 인연이 있었다. 다시 말해 태종은 양녕대군과 충녕대군 모두 과거시험 동기들의 딸을 며느리로 맞이한 것이다.

[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태종은 왜 효령을 건너뛰었을까-청권사에서
[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태종은 왜 효령을 건너뛰었을까-청권사에서

청권사 뒤쪽은 서리풀공원과 맞닿아 있다. 2015년 군부대 이전과 함께 공원과 산책로가 조성됐다. 강남 한복판인데도 깊은 숲속에 들어와 있는 듯 고요하다.

상수리나무 등 여러 나무가 아름답고 전망도 좋다. 공원 같은 묘역의 벤치에 앉아 있노라면 시간 가는 줄 잊게 된다.

태종은 15년이나 세자 교육을 받은 첫째 양녕대군을 폐세자했다. 그렇다면 둘째 효령대군은 왜 건너뛰었을까.

세자 교체 당시 《태종실록》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술을 마시는 게 좋은 건 없지만 중국의 사신을 대할 때 주인으로서 술을 한 모금도 마실 수 없다면 어찌 손님에게 권하고 그 마음을 즐겁게 할 수 있겠는가. 충녕은 비록 술을 잘 마시지 못하지만 적당히 마시고 그칠 줄 안다. 효령대군은 술을 한 모금도 마시지 못하니 이것도 역시 불가한 이유다. 여러모로 충녕대군이 임금을 맡을 만하니 충녕으로 세자를 정한다.”

(《태종실록》 태종 18년 6월 13일)

물론 태종은 술, 이 한 가지 이유만으로 충녕대군을 세자로 정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같은 날 《태종실록》에는 효령대군에 대해 다음과 같은 평가도 나온다.

“효령은 자질이 미약하고 진중하게 일을 처리하지 못한다. 성격이 곧아서 그저 빙그레 웃기만 한다.”

왕위를 계승할 사람에게는 인품, 학문뿐 아니라 정치적 판단력과 상황에 맞게 대처하는 능력도 필요하다고 본 것이다. 효령대군 역시 스스로 왕위를 양보했다고만 보기는 어려운 대목이다.

효령대군은 조카 수양대군의 계유정난 때 형 양녕대군처럼 수양대군을 지지했다. 수양대군이 동생 안평대군을 사사한 뒤, 인왕산 수성동 계곡에 있던 안평대군의 별장 비해당(匪懈堂)은 효령대군의 소유가 됐다.

1465년(세조 11년), 고려 때 흥복사(興福寺)가 있었다가 빈터로 남아 있던 곳에 원각사 건립을 주청하고 도제조로 참여한 것도 주목할 만하다. 세조의 집권으로 혼란스러웠던 정국을 안정시키기 위한 행보로 해석하는 시각이 있다.

[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태종은 왜 효령을 건너뛰었을까-청권사에서
[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태종은 왜 효령을 건너뛰었을까-청권사에서

효령대군은 92세까지 살았다.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장수였다. 동생 세종이 53세에 승하한 것과도 대조된다. 슬하에 7남 2녀를 뒀고, 손자 33명과 증손자 110명을 뒀다. 전주 이씨 문중에서는 효령대군의 자손이 가장 번성했다고 한다.

현재 서울 마포구 망원동(望遠洞)이라는 지명은 망원정(望遠亭)에서 유래했다. 망원정은 1424년(세종 6년) 효령대군이 별장으로 지은 정자였다. 처음에는 합강정이라 했으며, 이듬해 세종이 행차했을 때 가뭄 끝에 비가 내리자 희우정(喜雨亭)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이후 성종 때 성종의 형 월산대군이 정자를 물려받으면서 망원정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효령대군은 왕위 계승에서는 물러났지만, 장수하며 여러 왕대를 거친 왕실의 어른으로 살아갔다.

태종의 아들들은 각기 뛰어난 자질과 장점을 지니고 있었다. 양녕대군은 당대의 명필이자 시인이었으며, 호방한 기질을 지녔다. 효령대군은 부모를 섬기는 데 극진했고, 활쏘기에도 능했다. 충녕대군 역시 학문과 정치적 판단력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태종은 왕위 계승에서 출생 순서보다 군주로서의 자질을 우선시했다. 아버지로서의 정에 연연하기보다 종묘사직을 먼저 생각하며, 참으로 고독하고 어려운 결단을 내린 것이다. 태종의 여러 결단을 돌이켜보면 참으로 대단한 군주였다는 생각이 든다.

청권사를 돌아보며 다시 생각한다. 태종의 선택에는 왕실의 혈통과 형제간의 정을 넘어 나라를 이끌 후계자를 선택해야 했던 군주의 고민이 담겨 있었다. 청권사에 남은 효령대군의 삶은 조선의 왕위 계승이 어떤 판단과 선택 속에서 이루어졌는지를 되묻게 한다.

조수진 전 국회의원
조수진 전 국회의원

글 : 조수진 전 국회의원
- 제21대 국회의원(전 양천갑 당협위원장)
- 국민의힘 수석최고위원, 최고위원
- 제21대 국회 법제사법, 국회운영위원
- 동아일보 정치부 기자, 논설위원
- 채널A '직언직설' 앵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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