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정조(正祖)의 개혁을 뒷받침한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여유당(與猶堂)에서 오늘의 실학(實學)을 묻다

기획·특집 | 조수진  기자 |입력

정조의 개혁 구상과 다산의 실용적 지식 18년 유배와 저술에 담긴 국가 제도·백성의 삶에 대한 고민 과거의 실학에서 오늘날의 현실 문제 해결을 묻다

[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정조의 개혁을 뒷받침한 다산 정약용, 여유당에서 오늘의 실학을 묻다
[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정조의 개혁을 뒷받침한 다산 정약용, 여유당에서 오늘의 실학을 묻다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두물머리(兩水頭)에서 멀지 않은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1970년대 초 개발제한구역으로 묶인 데 이어 1975년에는 팔당 상수원보호구역으로 지정돼 규제가 하나 더 추가됐다. 역설적이게도 덕분에 풍광은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강마을의 옛 이름은 마재(馬峴).

조선 후기 문신이자 유학자이며, 발명가·저술가·시인이자 철학자였던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 1762~1836)은 이곳에서 태어났다. 나주 정씨(羅州丁氏)의 집성촌이었다.

정약용이 태어나 청소년기를 보낸 곳, 18년의 유배 생활을 마치고 돌아와 머문 곳, 그리고 1836년 생을 마감한 곳. 다산의 생애와 실학의 자취를 찾아 마재로 향한다.

다산 생가의 사랑채에는 ‘여유당(與猶堂)’이라는 당호(堂號)가 걸려 있다. 1800년(정조 24년) 봄, 다산이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 마재로 돌아와 집에 붙인 이름이다. ‘여유(與猶)’는 노자(老子)의 『도덕경(道德經)』에 나오는 말에서 따왔다. 겨울에 살얼음 낀 개울을 건너듯 조심하고, 사방에서 자신을 엿보는 이웃을 경계하듯 신중하라는 뜻이다. 자신의 처지와 앞으로 살아갈 태도를 담은 당호였다.

공교롭게도 그해 6월 정조가 승하했다. 다산은 든든한 후원자를 잃었다.

[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정조의 개혁을 뒷받침한 다산 정약용, 여유당에서 오늘의 실학을 묻다
[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정조의 개혁을 뒷받침한 다산 정약용, 여유당에서 오늘의 실학을 묻다

다산은 정조와 각별한 관계였다. 22세 때인 1783년(정조 7년), 세자 책봉을 경축하는 증광감시(增廣監試)에서 진사시에 합격하고 정조를 알현했다. 이때가 두 사람의 첫 만남이었다. 28세가 되던 1789년(정조 13년)에는 문과에 급제해 본격적으로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정조에게 다산은 학문적 재능을 갖춘 신하이자, 개혁의 구상을 현실의 제도와 기술로 구현할 수 있는 인재였다. 다산 역시 정조의 신임 속에서 자신의 학문과 재능을 펼칠 수 있었다.

다산의 재능이 두드러지게 드러난 것은 정조가 추진한 대규모 사업에서였다. 1795년은 정조 즉위 20년이자 혜경궁 홍씨(惠慶宮 洪氏)의 회갑인 해로, 이를 기념하는 대규모 행사가 기획됐다. 행사 중에는 정조가 어머니를 모시고 한양에서 수원 화성으로 행차하는 원행(園幸)이 있었다. 이때 많은 인원이 한강을 안전하게 건널 수 있도록 배다리를 설치하는 일이 중요한 과제였다.

정약용은 배다리 건설에 필요한 기술적 방안을 마련하는 데 참여했다. 배를 이용해 강 위에 다리를 놓고, 배의 배열과 구조를 고려해 안정적으로 유지하도록 했다. 이는 학문을 현실의 문제 해결에 활용하려 했던 다산의 면모를 보여준다.

[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정조의 개혁을 뒷받침한 다산 정약용, 여유당에서 오늘의 실학을 묻다
[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정조의 개혁을 뒷받침한 다산 정약용, 여유당에서 오늘의 실학을 묻다

수원화성(水原華城) 건설에서도 다산의 기술적 역량이 발휘됐다. 정조가 추진한 화성 축성 사업에서 다산은 성곽 설계와 건설 기구의 고안에 기여했다. 무거운 돌을 들어 올리는 데 사용한 거중기(擧重機)와 녹로(轆轤) 등이 대표적이다. 노동력을 줄이고 공사의 효율을 높이려는 시도였다.

둘레 약 5.7km에 이르는 성곽을 건설하는 대역사였지만, 공사는 2년 9개월 만에 마무리됐다. 다산의 기술적 지식은 정조가 추진한 국가 사업을 뒷받침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배다리와 수원화성은 정조의 개혁 구상과 다산의 실용적 지식이 만나는 지점이었다. 정조가 국가 운영의 방향을 구상했다면, 다산은 그 구상이 현실에서 작동하도록 기술과 제도를 고민한 인물이었다.

든든한 후원자였던 정조의 승하는 다산에게 청천벽력과 같은 일이었다. 다산의 나이는 서른아홉이었다.

다산은 ‘여유당’이라는 이름처럼 조심스럽게 살아가려 했지만, 이듬해부터 집안은 거센 정치적 풍파에 휩싸였다. 천주교와 관련된 정약용 형제들의 이력이 문제가 됐다. 정순왕후(貞純王后, 영조의 계비)의 수렴청정 아래 노론 벽파(老論僻派)가 정국을 주도하면서 1801년 신유박해(辛酉迫害)가 일어났다.

셋째 형 정약종(丁若鍾)은 처형됐고, 둘째 형 정약전(丁若銓)과 다산은 체포돼 문초를 받았다. 다산은 목숨을 건졌지만 경상도 장기(長鬐)로 유배됐다. 이후 큰형 정약현(丁若鉉)의 사위 황사영(黃嗣永)이 일으킨 이른바 ‘황사영 백서(黃嗣永帛書) 사건’이 터지면서 다산은 다시 체포돼 조사를 받았다. 정약전은 신지도(薪智島)를 거쳐 흑산도(黑山島)로, 다산은 강진(康津)으로 유배지가 바뀌었다.

정약전은 흑산도에서 바다 생물과 해양 환경을 관찰하고, 섬사람들의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자산어보(玆山魚譜)』를 비롯한 저술을 남겼다. 바다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유용한 지식을 정리하려 했다는 점에서 그의 학문 역시 현실과 밀착해 있었다.

조심하고 경계하겠다는 다산의 다짐은 단순한 겸손의 표현이 아니었다. 정치적 격랑 속에서 자신과 가족의 삶을 지켜야 했던 한 지식인의 절박한 마음이었다.

여유당은 1925년 을축년대홍수(乙丑年大洪水)로 유실됐다가 1986년에 복원됐다. 지금의 건물은 다산이 살던 집의 모습을 되살린 것이다.

[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정조의 개혁을 뒷받침한 다산 정약용, 여유당에서 오늘의 실학을 묻다
[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정조의 개혁을 뒷받침한 다산 정약용, 여유당에서 오늘의 실학을 묻다

이번에는 여유당 뒤편 언덕을 오른다. 이곳에는 다산과 부인의 합장묘(合葬墓)가 있다. 생가와 묘가 같은 공간에 있는 것은 낯설다. 해설사를 찾아 묻자 “다산의 유언을 따른 것으로 안다”고 했다.

태어난 집인 생가와 잠든 집인 무덤이 한 공간에 있다는 것은 유배로 점철된 정약용의 삶이 결국 고향 마재에서 마무리됐음을 보여주는 것 아닐까. 묘역은 높은 곳에 있어 을축년대홍수의 피해를 피할 수 있었다고 한다.

강진 유배 시절 다산은 아전 이학래의 집 등을 전전하다가, 1808년 해남 윤씨(海南尹氏) 외가의 도움으로 만덕산(萬德山) 아래에 초당을 마련하고 본격적으로 학문에 몰두했다. 백성을 다스리는 관리의 자세를 논한 『목민심서(牧民心書)』, 국가 제도와 행정 개혁의 방향을 제시한 『경세유표(經世遺表)』 등 수많은 저술을 남겼다.

오랜 유배 생활은 관료로서는 좌절의 시간이었지만, 학자로서는 자신의 사상을 집대성하는 시간이었다. 정조의 죽음으로 개혁 정치에 참여할 기회는 사라졌지만, 현실을 바꾸려는 다산의 고민까지 멈춘 것은 아니었다. 유배지에서 남긴 저술에는 국가 제도와 백성의 삶을 개선하려는 그의 문제의식이 담겨 있었다.

1818년 8월 해배(解配)가 결정되자 다산은 강진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왔다. 18년 만의 귀향이었다.

마재로 돌아온 뒤에도 다산은 저술에 열중했다. 1836년, 다산은 회혼(回婚, 결혼 60주년)을 사흘 앞두고 아내에게 바치는 회근시(回巹詩)를 지었다.

“눈 깜빡할 사이 예순 해가 지나가니 / 복사꽃 짙은 봄빛 신혼 때와 같구려.”

긴 세월의 흐름과 부부의 정을 담은 시다. 젊은 날의 이별과 오랜 유배, 기쁨과 슬픔이 교차한 생애를 함께 견뎌낸 아내에게 보내는 깊은 감사의 마음이 담겨 있다. 회혼을 맞아 친척과 제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다산은 7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여유당 바로 앞에 자리한 실학박물관(實學博物館)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다산 한 사람의 생애에 머무르지 않고 조선 후기 약 200년에 걸친 실학의 흐름을 보여준다.

임진왜란(壬辰倭亂)과 병자호란(丙子胡亂) 이후 조선 사회는 기존의 제도와 질서를 돌아보고 새로운 국가 운영 방식을 모색해야 했다. 중국을 통해 들어온 서양의 과학기술과 새로운 지식도 이러한 변화에 영향을 미쳤다. 농업과 토지 제도를 개혁하고 상공업을 발전시키려는 움직임 속에서 실학이 성장했다.

『반계수록(磻溪隨錄)』을 지은 유형원(柳馨遠)은 토지와 국가 제도를 근본적으로 개혁할 것을 주장했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후대 실학자들에게 이어졌고, 정조 시대의 개혁 정책과 다산의 경세학(經世學)을 이해하는 중요한 배경이 됐다.

실학의 문제의식은 정조 시대에 이르러 개혁 정치와 만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정조는 규장각(奎章閣)을 통해 학문과 정책을 연결하고, 인재를 발탁해 국가 운영의 변화를 모색했다. 다산은 이러한 시대적 흐름 속에서 자신의 능력을 펼친 인물이었다.

그러나 정조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다산은 정치적 기반을 잃었고, 오랜 유배 생활을 겪어야 했다. 관료로서 개혁을 실현할 기회는 사라졌지만, 학문을 통해 현실을 바꾸려는 그의 노력까지 멈춘 것은 아니었다. 유배지에서 집필한 수많은 저술에는 그가 평생 고민했던 국가 제도와 백성의 삶에 대한 답이 담겨 있었다.

실학박물관에서는 서양 과학을 주체적으로 수용한 천문과 지리 분야의 성과를 다룬 전시관이 유독 눈에 띈다. 1669년 송이영(宋以頴)이 제작한 혼천시계(渾天時計)와 관련된 혼천의(渾天儀), 1787년 유금(柳琴)이 만든 혼개통헌의(渾蓋通憲儀)를 볼 수 있다.

혼개통헌의는 서양의 아스트로라브를 바탕으로 조선의 학자가 새롭게 제작한 천문 관측 기구다. 별의 위치를 관측하고 천문 정보를 파악하는 데 활용됐다. 상당수 전시품이 실학자 후손들의 기증으로 박물관에 들어왔다는 사실도 뜻깊다.

실학은 옛것을 익혀 새것을 창조한다는 법고창신(法古創新), 사실에 근거해 진리를 탐구한다는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정신을 중시했다. 과거의 지식을 무조건 따르거나 새로운 것을 맹목적으로 좇는 대신, 현실의 문제를 정확히 파악하고 더 나은 해결책을 찾으려 했다.

그렇다면 오늘날 실학은 무엇이어야 할까.

기후 위기와 지역 소멸, 기술 발전 속에서 심화하는 개인의 소외 등 우리가 마주한 문제는 결코 가볍지 않다. 과거의 실학자들이 백성의 삶을 개선하고 국가 제도를 바로잡기 위해 고민했듯, 현실을 직시하고 구체적인 해법을 찾아야 한다.

정조는 개혁의 뜻을 펼칠 인재를 찾았고, 다산은 학문과 기술을 통해 그 뜻을 현실에 구현하려 했다. 정조의 죽음으로 두 사람이 함께했던 시간은 끝났지만, 다산은 유배지에서도 백성의 삶과 국가 제도를 고민하며 자신의 학문을 이어갔다.

마재에서 만난 정조와 다산의 시대는 오늘날에도 질문을 던진다. 좋은 뜻을 품는 것만으로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 그 뜻을 현실의 변화로 이어갈 지식과 실천이 필요하다.

우리는 지금,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얼마나 치열하게 고민하고 있는가.

조수진 전 국회의원
조수진 전 국회의원

글 : 조수진 전 국회의원
- 제21대 국회의원(전 양천갑 당협위원장)
- 국민의힘 수석최고위원, 최고위원
- 제21대 국회 법제사법, 국회운영위원
- 동아일보 정치부 기자, 논설위원
- 채널A '직언직설' 앵커

×

댓글 (0)

아직 댓글이 없습니다.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댓글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