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두 차례 수렴청정으로 안동 김씨 세도정치의 정점에 선 순원왕후와 인릉

기획·특집 | 조수진  기자 |입력

두 차례 수렴청정으로 헌종과 철종의 즉위에 관여한 순원왕후…안동 김씨 세도정치의 정점에 서다 정조의 신임에서 시작된 김조순 가문의 권력 확대…왕실 외척을 중심으로 재편된 조선 후기 정치 15·16세기 옛 왕릉 석물을 재활용해 조성한 인릉…조선 전기와 후기의 능제 양식이 공존

[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두 차례 수렴청정으로 안동 김씨 세도정치의 정점에 선 순원왕후와 인릉
[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두 차례 수렴청정으로 안동 김씨 세도정치의 정점에 선 순원왕후와 인릉

서울 서초구 내곡동, 헌릉 옆에 자리한 인릉(仁陵)은 조선 23대 왕 순조(純祖, 1790~1834)와 순원왕후 김씨(純元王后 金氏, 1789~1857)의 합장능이다.

순조는 1800년(정조 24년) 1월 11세의 나이로 왕세자에 책봉됐고, 그해 6월 아버지 정조(正祖)가 승하하자 왕위에 올랐다.

어린 순조를 대신해 1804년까지 약 4년간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한 사람은 증조할머니인 영조의 계비(繼妃) 정순왕후 김씨(貞純王后 金氏, 1745~1805)였다.

이 시기 정순왕후의 친정인 경주 김씨와 노론 벽파(僻派) 세력이 정국을 주도했다. 당시 노론은 사도세자 문제를 둘러싼 정치적 입장 차이에 따라 벽파와 시파(時派)로 나뉘어 있었다.

1805년 정순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벽파의 영향력은 약화됐다. 이후 순조의 장인 김조순(金祖淳)을 중심으로 한 안동 김씨가 권력을 장악하면서 이른바 60여 년에 걸친 세도정치가 본격화됐다.

순조는 1804년 12월부터 친정(親政)에 들어갔으나, 정국의 주도권은 이미 김조순을 비롯한 안동 김씨 세력으로 기울어 있었다. 순조는 재위 34년인 1834년, 45세의 나이로 승하했다.

순조는 순원왕후와의 사이에서 1남 3녀를 두었다. 외아들 효명세자(孝明世子, 1809~1830)는 22세에 요절했고, 세 공주인 명온공주(明溫公主), 복온공주(福溫公主), 덕온공주(德溫公主)도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결국 순조의 손자인 8세의 헌종(憲宗)이 왕위를 계승했다. 이때 헌종을 대신해 약 7년간 수렴청정을 한 사람이 바로 순원왕후다.

[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두 차례 수렴청정으로 안동 김씨 세도정치의 정점에 선 순원왕후와 인릉
[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두 차례 수렴청정으로 안동 김씨 세도정치의 정점에 선 순원왕후와 인릉

헌종이 1849년 후사 없이 22세의 나이로 승하하자, 순원왕후는 강화도에서 지내던 철종(哲宗)을 왕위에 올리고 다시 수렴청정을 했다. 순원왕후는 두 차례 수렴청정을 한 인물이다.

순원왕후는 안동 김씨 김조순의 딸이다. 김조순의 가문은 조선 후기 손꼽히는 명문 사대부 집안이었다. 그는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와의 화의를 반대하고 끝까지 척화론을 주장한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 1570~1652)의 후손이다.

김상헌의 형 김상용(金尙容, 1561~1637) 역시 병자호란 때 강화도가 함락되자 순절했다. 두 형제의 충절은 안동 김씨 가문의 명성을 높이는 중요한 기반이 됐다. 이후 안동 김씨는 조선의 정계와 학계에서 영향력을 확대했다.

김상헌의 후손 가운데 영의정을 지낸 김수항(金壽恒, 1629~1689)이 있었고, 김수항의 아들 김창집(金昌集, 1648~1722)도 영의정에 올랐다. 김창집은 노론 4대신 가운데 한 사람으로 신임사화 때 사사됐다. 김창집의 아들 김제겸(金濟謙, 1680~1722) 역시 신임사화 때 죽임을 당했다.

이후 이들은 영조 때 복권되면서 노론의 충절과 의리를 상징하는 인물로 자리 잡았다.

김조순은 김제겸의 증손자로, 정조(正祖) 때 문신으로 활동하며 학문과 문장, 정치적 역량을 인정받았다. 정조는 어린 아들 순조의 교육을 맡길 인물로 김조순을 발탁해 원자의 사부(師傅)로 삼았다.

즉, 김조순은 훗날 순조의 장인이 되기 전부터 이미 어린 왕세자의 교육을 담당하는 스승이었다.

1800년 정조는 순조의 왕비를 간택하는 과정에서 김조순의 딸을 직접 선택했다. 정조는 김조순에게 왕실의 미래를 맡길 만큼 깊은 신뢰를 보였다. 그러나 정조는 그해 6월 갑자기 승하했다.

순조와 김조순의 딸은 1802년 혼례를 올렸고, 딸은 세자빈이 아닌 왕비 순원왕후가 됐다.

[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두 차례 수렴청정으로 안동 김씨 세도정치의 정점에 선 순원왕후와 인릉
[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두 차례 수렴청정으로 안동 김씨 세도정치의 정점에 선 순원왕후와 인릉

김조순은 왕의 스승에서 장인으로, 다시 왕실의 외척으로 자리 잡았다. 척신(戚臣) 정치의 폐해를 경계했던 정조의 신임이 훗날 세도정치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은 역사의 아이러니라 할 수 있겠다.

순조는 안동 김씨의 세력이 지나치게 커지자 아들 효명세자를 풍양 조씨의 딸과 혼인시켰다. 훗날 신정왕후(神貞王后)가 되는 조씨를 며느리로 맞아 외척 세력의 균형을 꾀하려 한 것이다.

그러나 효명세자가 1830년 22세의 나이로 요절하고, 순조마저 1834년 세상을 떠나면서 안동 김씨의 권력은 더욱 강해졌다.

손자 헌종이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순원왕후는 다시 수렴청정을 하게 됐다. 이때 자신의 친정 조카 김조근(金祖根)의 딸을 며느리이자 헌종의 왕비인 효현왕후(孝顯王后, 1828~1843)로 맞아들였다.

순원왕후는 수렴청정을 하면서 왕실 의례를 비롯한 여러 정치적 문제를 친동생 김유근(金逌根), 김원근(金元根), 김좌근 등과 의논해 결정하는 일이 많았다. 재종동생 김홍근(金弘根), 김응근(金應根), 김흥근(金興根) 등도 조정의 주요 관직을 두루 거치며 권력의 중심에 자리 잡았다.

1849년(헌종 15년) 헌종이 후사 없이 세상을 떠나자 순원왕후는 왕위 계승자를 결정해야 했다. 그녀는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증손자이자 은언군(恩彦君) 이인(李裀)의 손자인 전계대원군(全溪大院君) 이광(李壙)의 셋째 아들 이원범(李元範)을 왕위 계승자로 지목했다. 그가 바로 철종이다.

강화도에서 농사를 지으며 평범하게 살던 이원범은 하루아침에 왕이 됐다. 순원왕후는 철종을 순조와 자신의 아들로 입후(入後)해 왕통을 잇게 하고 다시 수렴청정을 했다.

안동 김씨의 권력 기반은 더욱 강화됐다. 순원왕후는 친정 조카 김문근(金汶根)의 딸을 철종의 왕비인 철인왕후(哲仁王后, 1837~1878)로 맞아들였다. 철종 때 수렴청정을 하면서도 친동생 김좌근과 재종동생 김흥근 등 친정 세력에 크게 의지했다.

인릉은 순조가 세상을 떠난 이듬해인 1835년 파주 교하, 인조와 인열왕후 한씨의 장릉(長陵) 인근에 조성됐다. 그러나 풍수지리상 길하지 않다는 논의가 제기되면서 1856년(철종 7년) 태종과 원경왕후의 헌릉(獻陵) 서쪽 언덕인 현재의 자리로 천장(遷葬)했다.

이곳은 세종과 소헌왕후의 옛 영릉(英陵), 장경왕후(중종의 두 번째 왕비)의 옛 희릉(禧陵)이 있던 자리와 인접해 있었다. 천장 과정에서 옛 영릉과 옛 희릉에서 사용했던 석물들을 다시 꺼내 인릉 조성에 활용했다.

장명등(長明燈) 등 여러 석물이 재활용됐다. 15세기와 16세기에 제작된 석물들이 19세기 인릉에 다시 사용된 것이다. 인릉의 석물은 조선 전기와 후기의 왕릉 조성 양식이 한곳에 공존하는 특별한 사례다.

인릉은 이웃한 태종과 원경왕후의 헌릉처럼 능침 가까이까지 올라가 살펴볼 수 있다. 능침을 바라봤을 때 오른쪽으로 올라가는 길이 나 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석물마다 크기와 형태가 제각각이고, 크기도 들쭉날쭉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일반적인 홍살문은 주춧돌 위에 나무기둥을 세운 형태지만, 인릉의 홍살문은 기둥을 지탱하는 석조 구조가 독특하다. 두 개의 육중한 돌기둥에 구멍을 뚫어 고정한 모습이 마치 사찰의 당간지주를 연상시킨다(사진 참조).

왕릉의 홍살문에서 불교 건축의 석조 구조물을 떠올리게 되는 점이 흥미롭다.

1857년 순원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순조 곁에 합장했다.

[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두 차례 수렴청정으로 안동 김씨 세도정치의 정점에 선 순원왕후와 인릉
[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두 차례 수렴청정으로 안동 김씨 세도정치의 정점에 선 순원왕후와 인릉

왕릉의 역사에는 풍수지리와 정치적 판단, 왕실의 재정 문제가 복잡하게 얽혀 있다. 한때 명당으로 여겨졌던 곳이 세월이 흐르면서 흉지로 판단돼 능을 옮기기도 하고, 그렇게 버려진 옛 능터가 다시 다른 왕릉의 자리가 되기도 했다.

순원왕후는 순조의 왕비로 시작해 헌종과 철종 두 임금의 즉위와 통치에 관여한 인물이다. 순원왕후의 삶을 따라가다 보면 조선 후기 왕실의 권력 다툼과 외척 정치, 그리고 세도정치의 흥망을 함께 만나게 된다.

외척의 발호를 막기 위해 고난을 함께했던 처남 넷마저 자진하게 한 태종과, 이로 인해 피눈물을 흘려야 했던 원경왕후. 그들의 능 곁에 훗날 외척이 권력을 장악한 세도정치의 문을 연 순원왕후의 능이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한편 효명세자의 세자빈이었던 풍양 조씨는 헌종의 어머니 신정왕후(神貞王后)로, 훗날 조대비(趙大妃)라 불린 인물이다. 철종이 1863년 후사 없이 승하하자 조대비는 흥선대원군과 손잡고 그의 아들 고종(高宗)을 왕위에 올렸다.

이후 조대비의 수렴청정과 흥선대원군의 집권을 거치면서 60년 가까이 이어진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는 막을 내렸다.

조수진 전 국회의원
조수진 전 국회의원

글 : 조수진 전 국회의원
- 제21대 국회의원(전 양천갑 당협위원장)
- 국민의힘 수석최고위원, 최고위원
- 제21대 국회 법제사법, 국회운영위원
- 동아일보 정치부 기자, 논설위원
- 채널A '직언직설' 앵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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