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여인천하, 문정왕후(文定王后)의 태릉(泰陵)

기획·특집 | 조수진  기자 |입력

약 8년간 수렴청정하며 권력을 장악한 문정왕후 을사사화와 외척 정치가 남긴 흔적 태릉과 강릉에 담긴 왕실 권력과 문화유산의 역사

[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여인천하, 문정왕후의 태릉
[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여인천하, 문정왕후의 태릉

태릉(泰陵).

이름부터 강하고 남성적이다. ‘클 태(泰)’ 자가 주는 위엄 때문일까. 왕비의 무덤이라는 사실을 잠시 잊게 할 만큼 능호에서부터 강한 기운이 느껴진다.

태릉은 조선 제11대 왕 중종(中宗, 1488~1544)의 세 번째 왕비인 문정왕후 윤씨(文定王后 尹氏, 1501~1565)의 능이다.

왕비의 단릉(單陵)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웅장하다. 봉분에는 병풍석과 난간석이 둘러져 있고, 능을 지키는 문석인과 무석인도 큰 규모를 자랑한다. 능을 둘러보면 문정왕후가 생전에 누렸던 권력의 크기를 짐작할 수 있다.

문정왕후는 어린 아들을 대신해 약 8년간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며 조정의 권력을 장악했다. 수렴청정을 거둔 뒤에도 정치적 영향력을 놓지 않았다.

TV 역사 드라마나 교양 프로그램에서도 권력을 휘두르는 문정왕후의 모습이 자주 묘사된다. 왕비의 자리를 넘어 국정의 중심에 섰던 여인. ‘여인천하’라는 말이 어울리는 인물이다.

[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여인천하, 문정왕후의 태릉
[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여인천하, 문정왕후의 태릉

문정왕후는 1515년(중종 10년) 중종의 두번째 왕비 장경왕후(章敬王后, 1491~1515)가 인종을 낳은 지 엿새 만에 세상을 떠나자, 2년 후인 1517년(중종 12년) 17세의 나이로 왕비에 책봉됐다.

딸 넷을 낳은 뒤 왕비가 된 지 17년 만에 아들을 얻었다. 이미 장경왕후의 아들 인종(仁宗, 1515~1545)이 세자로 책봉돼 있는 상황에서 또 다른 왕자가 탄생한 것이다.

그가 훗날 왕위에 오르는 명종(明宗, 1534~1567)이다.

장경왕후의 오빠 윤임(尹任) 일파인 대윤(大尹)과 문정왕후의 동생 윤원형(尹元衡) 일파인 소윤(小尹) 사이에는 치열한 권력 다툼이 벌어졌다. 장경왕후의 아들 인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처음에는 대윤 세력이 우세한 듯 보였다. 하지만 인종이 재위 8개월 만에 승하하자 정국의 주도권은 소윤에게 넘어갔다.

이후 문정왕후의 아들 명종이 12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면서 문정왕후의 수렴청정이 시작됐다. 조선에서 수렴청정은 왕이 어린 나이에 즉위해 친정하기 어려울 때 왕실의 웃어른인 대비가 국정을 대신 맡는 제도였다.

여러 대비가 수렴청정을 했지만, 문정왕후의 경우는 그 기간과 정치적 영향력에서 주목할 만하다. 8년간 수렴청정을 했을 뿐 아니라, 이를 거둔 뒤에도 국정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문정왕후의 수렴청정은 왕실 여성의 정치적 권한이 어디까지 확대될 수 있었는지, 또 그 권력이 외척 정치와 결합할 때 어떤 폐단을 낳을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문정왕후는 동생 윤원형을 비롯한 소윤 세력을 앞세워 인종의 외척인 윤임 일파를 제거하는 을사사화(乙巳士禍)를 주도했다. 1545년(명종 즉위년)에 일어난 이 사건으로 많은 사람이 처벌받거나 목숨을 잃었다. 1547년(명종 2년)에는 양재역 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을 계기로 반대 세력에 대한 숙청이 확대됐다.

문정왕후와 소윤 세력은 조정의 주도권을 더욱 확고하게 장악했다. 문정왕후는 수렴청정이 끝난 뒤에도 정치적 영향력을 놓지 않았다.

[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여인천하, 문정왕후의 태릉
[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여인천하, 문정왕후의 태릉

『명종실록』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윤씨는 천성이 강한하고 문자를 알았다. (중략) 스스로 명종을 부립(扶立)한 공이 있다 하여 때로 주상에게 ‘너는 내가 아니면 어떻게 이 자리를 소유할 수 있었으랴’ 하고, 조금만 여의치 않으면 곧 꾸짖고 호통을 쳐서 마치 민가의 어머니가 어린 아들을 대하듯 함이 있었다."(1565년 4월 6일)

‘부립한 공’은 아들 명종을 왕위에 세운 공을 뜻한다.

실록의 기록에 아들을 왕위에 올린 자신의 공을 내세우며 국왕에게까지 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문정왕후의 모습이 여과 없이 담겨 있다. 유교를 통치 이념으로 삼은 조선에서 불교는 억압의 대상이었지만, 문정왕후는 승려 보우(普雨)를 신임하고 불교의 부흥을 꾀했다.

1550년(명종 5년)에는 선종과 교종의 양종을 부활시키고, 승려 과거시험인 승과와 승려의 자격을 인정하는 도첩제를 다시 시행했다. 보우를 봉은사(奉恩寺) 주지로 임명한 것도 이러한 정책의 일환이었다. 봉은사는 승과 시행과 불교 진흥의 중심지가 됐다.

문정왕후의 생애를 돌아보면 남편 중종의 능을 둘러싼 사연도 빼놓을 수 없다. 중종이 세상을 떠난 뒤 능은 두 번째 왕비인 장경왕후의 능 희릉(禧陵) 곁에 조성됐다. 그러나 문정왕후는 남편 중종의 곁에 묻히기를 원했다.

결국 1562년(명종 17년), 중종의 능은 현재의 고양시 서삼릉에서 서울 강남의 선릉(성종의 능) 곁으로 옮겨졌다. 하지만 새로 조성한 정릉(靖陵)은 지대가 낮아 장마철이면 침수 피해가 잦았다. 남편의 곁에 묻히려 했던 문정왕후의 뜻도 끝내 이루어지지 못했다.

문정왕후는 현재 서울 노원구에 있는 태릉에 홀로 묻혔다.

문정왕후의 강력한 권력자로서의 모습이 강조되면서 명종은 어머니의 그늘에 가려진 미약한 왕이라는 이미지를 갖게 된 것 같다. 명종은 어린 나이에 즉위해 어머니의 수렴청정을 받았고, 외척 세력이 정국을 주도하는 상황에서 왕권을 행사해야 했다.

1565년 문정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명종은 윤원형을 몰아내고 보우를 처벌하는 등 정국을 쇄신하려 했다. 그러나 문정왕후 사후 불과 2년 만인 1567년, 34세의 나이로 승하했다.

어머니의 그늘에서 벗어나 자신의 정치를 본격적으로 펼칠 기회는 길지 않았다.

명종과 인순왕후(仁順王后, 1532~1575) 사이에는 순회세자(順懷世子)가 있었으나, 세자는 12세에 일찍 세상을 떠났다. 명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면서 왕위는 중종의 서자 덕흥군(德興君)의 셋째 아들인 하성군(河城君)에게 이어졌다.

[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여인천하, 문정왕후의 태릉
[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여인천하, 문정왕후의 태릉

그가 바로 선조(宣祖)다.

명종과 인순왕후의 능인 강릉(康陵)은 태릉에서 약 1.3㎞ 떨어져 있다. 역사의 기록 속에서도 모자는 서로 다른 자리에 서 있었다. 어머니는 살아 생전 아들의 정치를 좌우했고, 아들은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뒤에야 정국을 바꾸려 했다.

두 사람의 능은 가까이 있지만, 그 사이에는 한 시대의 권력과 갈등이 놓여 있다.

태릉과 강릉은 조선 왕실의 역사를 간직한 공간인 동시에 현대 문화유산 보존의 과제를 안고 있다. 1960년대 태릉과 강릉 일대에는 태릉선수촌과 태릉골프장이 조성됐다. 이들 시설은 2009년 조선 왕릉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면서 논란의 대상이 됐다.

태릉 일대는 이제 조선 왕실의 역사뿐 아니라 문화유산 보존과 현대적 활용이라는 과제까지 함께 안고 있는 공간이 됐다.

조수진 전 국회의원
조수진 전 국회의원

글 : 조수진 전 국회의원
- 제21대 국회의원(전 양천갑 당협위원장)
- 국민의힘 수석최고위원, 최고위원
- 제21대 국회 법제사법, 국회운영위원
- 동아일보 정치부 기자, 논설위원
- 채널A '직언직설' 앵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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