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원빈(元嬪)의 작호(爵號)에 담긴 권력, 홍국영(洪國榮)의 몰락(沒落)

기획·특집 | 조수진  기자 |입력

‘으뜸’을 뜻한 원빈의 작호, 홍국영의 막강했던 정치적 위상 왕위 계승을 도운 공신에서 실각까지…정조의 신임을 잃은 홍국영 인명원에서 원빈묘로 격하된 무덤, 권력의 흥망을 증언하다

[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원빈(元嬪)의 작호(爵號)에 담긴 권력, 홍국영(洪國榮)의 몰락(沒落)
[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원빈(元嬪)의 작호(爵號)에 담긴 권력, 홍국영(洪國榮)의 몰락(沒落)

후궁 가운데 정1품 빈(嬪)의 작호에는 숙(淑)·순(純)·정(貞)·경(敬) 등 덕목을 상징하는 글자가 주로 쓰였다. 맑고, 순수하며, 정숙하고 공경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그런데 이들과는 결이 다른 글자를 작호로 삼은 후궁이 있었다. 바로 정조(正祖)의 후궁이자 홍국영(洪國榮)의 여동생인 원빈(元嬪) 홍씨(洪氏)다. 원(元)은 ‘으뜸’이라는 뜻이다. 왜 원빈이라는 작호가 정해졌을까.

원빈 홍씨의 묘는 서삼릉(西三陵) 후궁 묘역의 빈·귀인 묘역에 있다. 의빈 성씨(宜嬪成氏)의 묘와 이웃하고 있다.

정조가 왕위에 오르기까지는 숱한 난관이 있었다. 아버지 사도세자(思悼世子)는 할아버지 영조(英祖)에 의해 뒤주에 갇혀 8일 만에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고 간 정치 세력은 세손을 끊임없이 위협했고, 암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할아버지 영조 역시 정조에게 두려운 존재였다.

마침내 왕위에 오른 정조는 자신이 사도세자의 아들임을 분명히 했다.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라는 말로 상징되는 정조의 의지는 아버지의 죽음과 자신의 정통성을 둘러싼 정치적 갈등을 정면으로 돌파하려는 것이었다.

정조가 왕위에 오르기까지 위기를 겪을 때 힘이 되어준 인물이 홍국영이다. 홍국영은 정조보다 네 살 위였다. 본관은 풍산(豊山)으로, 선조(宣祖)의 딸 정명공주(貞明公主)와 혼인한 홍주원(洪柱元)의 6대손이었다. 준수한 외모에 시를 잘 짓고 언변도 뛰어났다고 전한다. 25세에 문과에 급제했다.

홍국영은 세손 시절부터 정조를 보필했다. 동궁시강원(東宮侍講院) 설서(說書)로 임명되면서 정조와 인연을 맺었다. 세손 시절 정조를 견제하던 홍인한(洪麟漢)·정후겸(鄭厚謙)·김귀주(金龜柱)·홍상간(洪相簡)·윤양로(尹養老) 등의 세력을 약화시키는 데 기여하며 정조의 즉위를 도왔다.

영조는 세상을 떠나기 약 3개월 전 세손에게 대리청정(代理聽政)을 맡겼다. 노론은 반대했고 세손 역시 처음에는 대리청정을 거부했다. 이때 홍국영은 대리청정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조가 당면한 위기를 넘기고 왕위에 오르려면 대리청정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얼마 뒤 영조가 세상을 떠나자 세손은 반대 없이 자연스럽게 왕위를 이어받았다.

정조가 즉위하자 권력은 홍국영에게 집중됐다. 그는 현재의 대통령비서실장에 비유할 수 있는 도승지(都承旨)에 올라 왕명 출납과 국정 보고를 장악했다. 조정의 주요 인사에도 영향력을 행사했고, 숙위소(宿衛所)를 설치해 숙위대장을 맡는 등 궁궐의 경호와 군사권까지 장악했다.

홍국영의 위세는 날로 커졌다. 조정의 대신들조차 그의 뜻을 거스르기 어려웠다. 정조의 신임을 바탕으로 국정 전반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 홍국영은 정조대 권력의 핵심 인물로 자리 잡았다. 이때부터 권세를 바탕으로 정국을 주도하는 정치 형태를 가리키는 ‘세도(勢道)’라는 말이 널리 쓰이게 됐다.

그러나 홍국영은 점차 권력을 사유화하는 모습을 보였다. 1778년(정조 2년) 6월, 홍국영의 여동생이 후궁으로 간택됐다. 당시 13세였던 홍씨는 곧바로 정1품 빈의 작호를 받고 원빈(元嬪)이 됐다. 삼간택과 가례의 절차를 거쳐 처음부터 빈으로 책봉된 이례적인 사례였다.

빈은 통상 왕자를 낳은 후궁에게 주어지는 품계였다는 점에서 원빈의 책봉은 특별한 예우였다. 더욱이 작호에는 ‘으뜸’을 뜻하는 원(元) 자가 쓰였다. 홍국영의 막강한 권세가 아니었다면 가능했을까. 원빈이라는 작호는 당시 홍국영의 정치적 위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원빈(元嬪)의 작호(爵號)에 담긴 권력, 홍국영(洪國榮)의 몰락(沒落)
[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원빈(元嬪)의 작호(爵號)에 담긴 권력, 홍국영(洪國榮)의 몰락(沒落)

그러나 원빈 홍씨는 입궁한 지 1년도 채 되지 않은 1779년(정조 3) 5월, 1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무덤은 오늘날 서울 성북구 안암동에 조성됐다. 당시 후궁의 무덤에 쓰던 ‘묘(墓)’ 대신 세자와 세자빈 등의 무덤에 붙이던 ‘원(園)’을 사용했다. 세자를 낳지 못한 후궁에게는 이례적인 예우였다. 무덤의 이름은 인명원(仁明園)이었다.

누이의 죽음으로 후사를 통한 권력 기반을 마련하려던 홍국영의 구상에도 차질이 생겼다. 그는 정조의 이복동생 은언군(恩彦君)의 아들 담(湛)을 원빈의 양자로 삼는 방안을 추진했다. 담에게는 완풍군(完豊君)이라는 군호가 주어졌다. 완풍의 ‘완(完)’은 왕실의 본관인 전주 이씨를, ‘풍(豊)’은 홍국영 자신의 본관인 풍산 홍씨를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왕실과 자신의 가문을 연결하려는 정치적 구상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홍국영은 정조의 정비인 효의왕후(孝懿王后)를 견제하는 데에도 나섰다. 원빈의 죽음을 효의왕후와 연결 지어 의심했고, 궁녀들을 추궁하는 등 왕비를 둘러싼 갈등을 키웠다. 이러한 행위는 왕실 내부의 갈등을 넘어 정조의 권위와도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홍국영은 정조의 신임을 잃었다. 1779년 9월, 정조는 홍국영에게 사직을 명했고 홍국영은 물러났다. 그는 머지않아 다시 부름을 받을 것이라 기대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정조는 그를 다시 등용하지 않았다.

홍국영을 처벌하라는 상소가 잇따랐고, 정조는 그의 도성 출입을 금했다. 홍국영은 강원도 일대를 떠돌며 지내다가 1781년(정조 5) 세상을 떠났다. 정조의 즉위를 도왔던 권력의 핵심 인물이 불과 몇 년 만에 몰락한 것이다.

홍국영의 실각 이후 원빈 홍씨의 묘호와 격을 둘러싼 논란도 이어졌다. 후사가 없는 후궁의 무덤에 원호를 붙인 것은 예법에 맞지 않는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결국 1786년(정조 10년) 인명원의 원호가 혁파되고 원빈묘(元嬪墓)로 격하됐다. 이 과정에서 홍살문과 정자각의 월대, 배위청 등이 철거됐다. 한때 왕실의 특별한 예우를 받았던 무덤은 격식이 축소된 묘역으로 남게 됐다.

[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원빈(元嬪)의 작호(爵號)에 담긴 권력, 홍국영(洪國榮)의 몰락(沒落)
[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원빈(元嬪)의 작호(爵號)에 담긴 권력, 홍국영(洪國榮)의 몰락(沒落)

원빈 홍씨의 묘역은 훗날 고려대학교에 편입됐다. 묘는 1950년 지금의 서삼릉으로 옮겨졌다. 고려대학교 이공대 캠퍼스를 ‘애기능 캠퍼스’라고 부르는 것도 이곳에 원빈의 묘가 있었기 때문이다.

원빈의 묘가 들어서기 전에는 무학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하는 영도사(永導寺)가 이 일대에 있었다. 묘역 조성으로 사찰은 조금 떨어진 곳으로 옮겨졌고, 이후 개운사(開運寺)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됐다고 한다.

정조는 홍국영이 물러난 뒤에도 그를 신임했던 과거를 돌아보며 그의 권력 행사를 비판했다. 나라의 안위와 정사를 함께 맡기려 권한을 주었지만, 홍국영이 스스로 삼가는 도리를 잊고 임금의 총애만 믿은 채 권력을 함부로 행사했다는 취지였다. 이 평가는 정조가 홍국영의 공로와 과오를 어떻게 바라보았는지 보여준다.

2인자의 권한은 스스로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1인자에게 부여받은 것이다. 권한이 커질수록 자신을 경계해야 하며, 신임을 권리로 착각해서도 안 된다. 홍국영의 몰락은 권력의 정점에 오른 사람이 어떻게 그 권력을 잃는지를 보여준다. '원빈'이라는 특별한 작호와 서삼릉의 쓸쓸한 묘역은 한때 조정을 뒤흔들었던 권세의 끝을 말 없이 증언하고 있다.

조수진 전 국회의원
조수진 전 국회의원

글 : 조수진 전 국회의원
- 제21대 국회의원(전 양천갑 당협위원장)
- 국민의힘 수석최고위원, 최고위원
- 제21대 국회 법제사법, 국회운영위원
- 동아일보 정치부 기자, 논설위원
- 채널A '직언직설' 앵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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