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유배지에서도 학문을 놓지 않다…추사의 ‘시련을 견디는 법’

기획·특집 | 조수진  기자 |입력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만난 〈불이선란도〉…거친 난초에 담긴 추사의 내면 제주와 북청 유배에도 멈추지 않은 탐구…돌도끼·돌화살촉까지 문헌으로 고증 시련 앞에서 놓지 않았던 붓과 학문, 고난을 견디는 삶의 태도를 묻다

[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유배지에서도 학문을 놓지 않다…추사의 ‘시련을 견디는 법’
[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유배지에서도 학문을 놓지 않다…추사의 ‘시련을 견디는 법’

추사 김정희(金正喜, 1786~1856)의 〈불이선란도(不二禪蘭圖)〉를 보기 위해 국립중앙박물관을 찾았다. 특별전 ‘추사 김정희와 그의 동반자’ 전시 기간 중 〈불이선란도〉는 한 달간(9월 13일까지)만 원본이 공개되고 다시 수장고로 들어가기 때문이었다. 조명과 산소에 지속적으로 노출되면 바스러지고 변색되는 것이 종이 유물의 운명이다.

평일 낮인데도 전시장은 관람객으로 꽉 차 있었다. 대부분 60~70대로 보이는 여성들이어서 한 번 놀랐고, 추사의 작품을 보기 위해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몰린다는 사실에 또 한 번 놀랐다.

〈불이선란도〉는 불교의 ‘불이(不二)’ 사상과 선(禪), 그리고 난초(蘭草)가 어우러진 그림이다. ‘불이(不二)’는 둘로 나눌 수 없다는 뜻이다. 나와 타인, 자연과 인간, 삶과 죽음처럼 서로 대립하는 것처럼 보이는 존재들이 사실은 서로 연결된 하나의 세계를 이룬다는 불교적 세계관을 담고 있다.

그림은 흔히 떠올리는 유려하고 예쁘장한 난초와는 완전히 다르다. 물기 없는 마른 붓으로 난초의 잎을 툭툭 거칠게 그어 내렸다. 난초 주변은 빼곡한 글씨로 채워져 있어 여백조차 거의 보이지 않는다. 화려하게 꾸미지 않은 난초와 거침없이 써 내려간 글씨. 그 속에서 오랜 유배생활의 고통과 세속의 번뇌(煩惱)를 예술로 승화시킨 추사의 내면을 엿볼 수 있었다.

[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유배지에서도 학문을 놓지 않다…추사의 ‘시련을 견디는 법’
[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유배지에서도 학문을 놓지 않다…추사의 ‘시련을 견디는 법’

김정희는 명문가의 자제였다. 그의 집안은 조선 후기 대표적인 벌족가문(閥族家門)이었다. 증조모가 영조(英祖)의 둘째 딸 화순옹주였으니 왕실과 혼맥이 닿아 있었고, 고조부 김흥경은 영의정, 조부 김한신은 형조판서를 지냈다. 부친 김노경 역시 예조·이조·형조판서를 두루 지냈다.

추사가 태어난 충남 예산의 추사고택(秋史古宅)은 영조가 하사한 땅에 지어진 것으로 전해진다. 현재 경복궁역 인근에는 추사가 살았던 월성위궁(月城尉宮)의 터를 알리는 표지석도 남아 있다. 1809년 24세 때에는 동지사 겸 사은사의 부사로 연경(燕京·北京)에 가는 아버지를 수행하면서 청나라의 뛰어난 학자들과 교류했다. 특히 청나라의 석학(碩學)이자 서예가·금석학자였던 옹방강(翁方綱) 등과 만나 학문적 안목을 넓혔다.

이후 높은 벼슬에 오르기까지 비교적 순탄한 길을 걸었다. 그러나 55세가 되던 1840년 정치적 사건에 연루되면서 제주로 유배됐다. 무려 8년여의 유배생활이었다.

제주 유배에서 풀려난 뒤에도 시련은 끝나지 않았다. 1851년 다시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돼 1년가량을 보냈다. 명문가의 자제로 태어나 학문과 관직에서 승승장구하던 대학자가 외딴 유배지에서 고난의 시간을 보내게 된 것이다.

이번 전시에서는 특히 눈길을 끈 작품이 있었다. 추사가 북청 유배 시기에 관심을 기울였던 돌도끼와 돌화살촉을 소재로 한 〈석노시첩(石弩詩帖)〉이다. 처음으로 공개된 이 작품은 11월까지 전시된다.

추사는 북청 인근 청해토성(靑海土城) 일대에서 발견된 돌도끼와 돌화살촉에 주목했다. 당시에는 이런 유물을 귀신의 조화나 약재 등과 관련된 것으로 보기도 했지만, 추사는 직접 문헌을 살피고 유물의 형태와 재질 등을 관찰하며 고증(考證)했다.

그는 돌도끼와 돌화살촉이 청해 일대에서 흔히 발견된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사기(史記)》의 〈공자세가(孔子世家)〉에 나오는 호시(楛矢)의 고사를 끌어왔다. 그리고 북방 민족인 숙신(肅愼)이 사용했던 돌화살촉과 연결해 이 유물의 성격을 밝혀내려 했다. 유배지에서도 추사의 학문은 멈추지 않았던 것이다.

추사는 옛 비석과 금석문(金石文)에 남은 글씨를 연구하는 금석학(金石學)에 깊이 파고들었다. 특히 북한산 비봉(碑峰)에 있던 비석을 진흥왕순수비(眞興王巡狩碑)로 밝혀내고, 황초령 진흥왕순수비에 대해서도 탁본과 연구를 통해 그 가치를 널리 알리는 등 고대 금석문 연구에 힘을 기울였다. 역사와 지리, 금석학에 대한 그의 관심은 유배 중에도 이어졌다.

추사의 삶은 순탄함과 추락이 극적으로 교차한다. 명문가의 자제로 태어나 청의 석학들과 교류하고 높은 벼슬에 올랐지만, 정치적 풍파를 만나 제주와 북청에서 유배생활을 해야 했다. 그러나 그는 고난을 원망하며 꺾이지 않았다. 유배지에서도 붓과 학문을 놓지 않았고, 역사를 바라보는 시선도 거두지 않았다. 오히려 고난 속에서 학문을 더욱 깊고 단단하게 만들어갔다.

사람은 누구나 뜻하지 않은 풍파를 만난다. 중요한 것은 시련이 없는 삶이 아니라, 시련 앞에서 무엇을 놓지 않는가에 있는지도 모른다. 추사에게 그것은 붓이었고 학문이었다. 그는 유배라는 혹독한 시련 속에서도 공부하고, 기록하고, 쓰고 그렸다. 그렇게 견뎌낸 시간은 훗날 그의 예술과 학문을 더욱 깊고 단단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그의 글과 그림을 바라보며 생각하게 된다. 시련은 사람의 삶을 무너뜨릴 수도 있지만, 그것을 어떻게 견디느냐에 따라 삶의 깊이를 더하는 시간이 될 수도 있다. 추사 김정희의 삶이 오늘날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이 바로 그것 아닐까.

조수진 전 국회의원
조수진 전 국회의원

글 : 조수진 전 국회의원
- 제21대 국회의원(전 양천갑 당협위원장)
- 국민의힘 수석최고위원, 최고위원
- 제21대 국회 법제사법, 국회운영위원
- 동아일보 정치부 기자, 논설위원
- 채널A '직언직설' 앵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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