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고려의 충신 최영과 조선 왕실 후손들이 잠든 대자산

기획·특집 | 조수진  기자 |입력

고려의 운명을 가른 최영과 이성계의 요동정벌…위화도회군으로 엇갈린 두 장수의 길 ‘황금을 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가르침이 남은 최영 장군 묘와 충절의 전설 고려의 마지막 충신과 조선 왕실 후손들이 함께 잠든 고양 대자산의 역사

[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고려의 충신 최영과 조선 왕실 후손들이 잠든 대자산

경기도 고양(高陽)은 조선시대 수도 한양(漢陽)과 가까워 왕실의 무덤이 많이 들어선 곳이다. 서삼릉(西三陵)과 서오릉(西五陵)을 비롯해 왕실과 왕족의 묘역이 곳곳에 자리하고 있다.

고양에는 ‘크게 자비로운 산’이라는 뜻의 대자산(大慈山)이 있다. 조선 제3대 왕 태종(太宗)의 넷째 아들 성녕대군(誠寧大君)이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나자 그의 명복을 빌기 위해 묘역 앞에 대자암(大慈庵)이라는 사찰을 세운 데서 이름이 비롯됐다고 한다.

대자산 기슭에는 성녕대군의 묘와 함께 소현세자(昭顯世子·1612~1645)의 아들 경안군(慶安君·1644~1665) 이회(李檜), 그리고 그의 아들 임창군(臨昌君·1663~1724)과 임성군(臨城君)의 묘도 자리하고 있다.

[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고려의 충신 최영과 조선 왕실 후손들이 잠든 대자산
[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고려의 충신 최영과 조선 왕실 후손들이 잠든 대자산

그런데, 대자산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다. 고려의 마지막 충신이자 명장으로 기억되는 최영(崔瑩·1316~1388) 장군이다.

끝까지 고려를 지키려 했던 최영과, 훗날 조선을 세운 이성계(李成桂)의 후손들이 같은 산자락에 잠들어 있는 것이다.

최영과 이성계, 한때는 같은 고려의 장수였다. 최영이 역사에 본격적으로 이름을 올린 것은 공민왕(恭愍王) 때였다. 1352년, 37세의 최영은 조일신(趙日新)의 난을 진압한 공로를 인정받아 정9품에서 정4품으로 파격적인 승진을 하며 중앙 정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원(元)이 내우외환에 시달리던 1356년, 공민왕은 고려의 옛 영토를 되찾기 위한 북방 수복에 나섰다. 당시 원나라가 고려를 지배하기 위해 설치했던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 지역이 그 대상이었다.

쌍성총관부 지역은 이자춘(李子春)과 그의 아들 이성계가 세력을 갖고 있었다. 이자춘이 고려에 협력하면서 쌍성총관부의 수복이 이루어졌고, 이 과정에서 젊은 이성계가 고려의 장수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최영과 이성계가 처음 만난 것도 이 무렵이다. 최영은 마흔 살, 이성계는 스물한 살이었다.

훗날 두 사람은 고려의 운명을 놓고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되지만, 처음부터 적대적인 관계였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최영은 젊은 이성계의 능력을 높이 평가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성계 역시 뛰어난 무장으로 성장했고, 최영의 신임을 받으며 중앙 정계에서 자신의 입지를 넓혀갔다.

한때는 같은 고려를 지키던 두 장수가 훗날 서로에게 칼을 겨누게 된 것이다.

두 사람의 운명을 갈라놓은 결정적인 사건은 요동정벌(遼東征伐)이었다. 원을 무너뜨리고 중국 대륙을 장악한 명(明)의 태조 주원장(朱元璋)은 고려에 여러 차례 영토와 외교 문제를 둘러싼 요구를 해왔다.

특히 1388년 명나라가 철령위(鐵嶺衛)를 설치하겠다고 통보하면서 고려 조정은 크게 긴장했다. 최영은 명의 요구를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맞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아가 요동을 선제적으로 공격해 명의 위협을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이성계는 요동정벌에 반대했다.

그가 내세운 것은 사불가론(四不可論)이었다.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공격하는 것은 옳지 않고, 여름철에 군사를 일으키는 것도 적절하지 않으며, 왜구의 침입 가능성이 있는 상황에서 대규모 병력을 국경 밖으로 보내는 것도 위험하다는 등의 논리였다.

하지만 우왕(禑王)은 최영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최영은 직접 출정하기보다 왕을 보좌하기 위해 개경에 남았고, 이성계가 요동정벌군을 이끌고 북쪽으로 향했다. 그러나 압록강 하류의 위화도(威化島)에 도착한 군대는 장마를 만났다. 강물이 불어나고 군사들의 피해가 커졌으며 탈영병도 발생했다.

이성계는 결국 회군을 결심했다. 그리고 1388년 5월,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을 단행했다. 이성계는 회군의 명분으로 왕과 최영을 비판했다.

“군사를 돌리기를 청하였으나 왕은 살펴보지 않고, 최영은 노쇠하여 듣지 않는다.”

회군군은 개경으로 돌아왔고, 이성계는 고려 조정을 장악했다.

위화도회군 이후 최영은 체포됐다. 고봉현(高峰縣), 오늘날의 고양 지역으로 유배됐다가 다시 압송돼 개경에서 처형됐다. 최영은 1388년 12월 세상을 떠났다.

그의 딸은 우왕의 비(妃)인 영비(寧妃)였으니, 최영에게 이성계의 군대는 단순한 정적의 군대가 아니었다. 고려 왕실과 자신의 집안을 둘러싼 모든 것이 한순간에 무너지는 상황이었다.

최영이 처형된 지 4년 뒤인 1392년, 이성계는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왕조를 세웠다. 이성계는 태조(太祖)가 됐고, 최영은 고려의 마지막 충신으로 기억됐다.

[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고려의 충신 최영과 조선 왕실 후손들이 잠든 대자산
[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고려의 충신 최영과 조선 왕실 후손들이 잠든 대자산

최영 장군 묘(墓)를 찾아가려면 네비게이션에 ‘최영 장군 묘’를 입력하면 된다. 대자산 어귀에 도착하면 커다란 돌비석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높이 약 3m의 화강암 비석에는 최영의 상징처럼 알려진 글귀가 새겨져 있다.

“황금을 보기를 돌같이 하라.”

아버지 최원직(崔元直)이 아들에게 남긴 가르침으로 알려진 말이다. 최영은 이 말을 평생 마음에 새기며 청렴하게 살았다고 전해진다. 비석은 최영 탄생 700주년을 맞은 2017년 고양문화원이 세운 것이다.

사유지 옆으로 난 산길을 따라 올라간다. 밤나무와 소나무가 울창하다.

도심에서 그리 멀지 않은데도 길은 호젓하다. 조금 더 올라가면 ‘최영 장군 묘 550m’라는 안내판이 나온다. 그리고 숲길 끝에서 최영과 그의 아버지 최원직의 묘를 만난다.

아버지와 아들의 무덤 두 무덤은 위아래로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고려시대 무덤 양식의 특징을 보여주는 사각형(方形) 형태다. 아들의 봉분이 아버지보다 크고 석물(石物)도 잘 갖추어져 있다. 최영이 아버지보다 높은 벼슬에 올랐던 인물이었음을 보여주는 듯하다.

아버지의 행적을 기록한 묘비는 최영이 직접 쓴 것으로 전해진다. 아버지의 묘비를 직접 쓰고, 훗날 자신 역시 바로 아래에 묻힌 것이다. 최영의 묘는 곡장(曲墻)에 둘러싸여 있다.

지금은 봉분에 잔디가 곱게 자라고 있다. 그런데 이 무덤에는 오래된 이야기가 전해진다. 최영이 죽은 뒤 오랫동안 무덤에 풀이 자라지 않았다는 것이다. 후손들이 잔디를 옮겨 심어도 제대로 자라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붉은 흙이 드러난 무덤을 ‘적분(赤墳)’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최영의 결백과 충절을 상징하는 이야기로 오랫동안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1970년대 이후에는 무덤에 다시 풀이 자라기 시작했다고 한다.

전설과 역사적 사실은 구분해야겠지만, 사람들은 이 이야기를 통해 최영을 바라보는 자신들의 마음을 표현해왔다.

최영은 뛰어난 장군이었고 고려에 충성을 다한 인물이었다.

요동정벌은 고려를 지키기 위한 최영의 결단이었지만, 당시 고려의 국력과 국제정세를 생각하면 명나라와의 전쟁이 현실적으로 얼마나 가능했는가라는 문제가 남는다.

이성계가 제시한 사불가론 역시 당시 고려가 처한 현실을 보여주는 중요한 기록이다. 결국 요동정벌은 실패했고, 최영은 몰락했다.

그리고 불과 4년 뒤 고려 역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최영 개인의 청렴함과 충절에 대한 평가와 별개로, 그가 속했던 고려의 지배층이 당시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었는가라는 문제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그럼에도 최영이 오랫동안 사람들의 기억 속에 살아남은 이유는 분명하다. 그는 적어도 사사로운 재물을 탐하거나 자신의 이익을 위해 고려를 버린 인물로 기억되지는 않는다.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이 지켜야 한다고 믿었던 나라를 위해 싸웠고, 결국 역사의 패자가 되어 생을 마쳤다.

그의 묘 앞에 서니 ‘역사의 승자’와 ‘역사의 패자’라는 말이 새삼 다르게 다가온다.

[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고려의 충신 최영과 조선 왕실 후손들이 잠든 대자산
[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고려의 충신 최영과 조선 왕실 후손들이 잠든 대자산

대자산을 내려오는 길에는 또 다른 무덤들이 기다리고 있다. 소현세자(昭顯世子)의 아들 경안군(慶安君)과 그의 아들 임창군(臨昌君)의 묘다. 조선 왕실의 후손들이다.

고려의 마지막을 지키려 했던 최영과,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세운 이성계의 후손들이 같은 대자산 자락에 잠들어 있는 것이다.

어쩌면 대자산이 품고 있는 가장 큰 역사는 바로 그것인지도 모른다.

조수진 전 국회의원
조수진 전 국회의원

글 : 조수진 전 국회의원
- 제21대 국회의원(전 양천갑 당협위원장)
- 국민의힘 수석최고위원, 최고위원
- 제21대 국회 법제사법, 국회운영위원
- 동아일보 정치부 기자, 논설위원
- 채널A '직언직설' 앵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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