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철종의 능에 16세기 석물이 들어선 까닭…‘강화도령’은 정말 무식한 왕이었을까

기획·특집 | 조수진  기자 |입력

국립고궁박물관에서 마주한 철종의 글씨…‘강화도령’이라는 통념에 질문을 던지다 중종의 옛 능터에 조성된 예릉, 300년의 시간을 건너 재사용된 석물 세도정치 속 준비되지 않은 군주, 철종의 삶을 다시 들여다보다

[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철종의 능에 16세기 석물이 들어선 까닭…‘강화도령’은 정말 무식한 왕이었을까
[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철종의 능에 16세기 석물이 들어선 까닭…‘강화도령’은 정말 무식한 왕이었을까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철종의 글씨를 직접 본 일이 있다. 힘이 있으면서도 흐트러지지 않았고, 기품이 느껴졌다. 글씨를 잘 쓴다는 평가를 받는 선조의 글씨만큼이나 잘 썼다는 느낌을 받았다. 왕실의 정식 교육을 충분히 받지 못한 채 강화도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왕이 된 ‘강화도령’의 이미지와는 많이 달랐다.

철종은 정말 ‘무식한 왕’이었을까.

1849년 6월, 헌종이 23세의 나이로 후사 없이 갑자기 승하했다. 왕위 계승을 결정할 위치에 있던 사람은 왕실의 최고 어른인 대왕대비 순원왕후(순조비, 1789~1857)였다. 순원왕후는 세도정치의 중심에 있던 안동 김씨 김조순의 딸이었고, 당시 정국은 안동 김씨 세력이 장악하고 있었다. 그때 선택된 사람이 강화도에 있던 이원범, 훗날의 철종이다.

철종은 사도세자의 아들이자 정조의 이복동생인 은언군의 증손자였다. 그러나 왕실의 가까운 후손이었던 그의 집안은 역모와 천주교 문제로 거듭 화를 입었다. 은언군은 1779년(정조 3년) 장남 상계군의 역모 사건이 발생하면서 강화도로 유배됐다.

1801년(순조 1년)에는 그의 부인 송씨와 며느리 신씨가 천주교를 신봉했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아 사사됐다. 은언군의 서자였던 철종의 생부 전계대원군 이광(1785~1841) 역시 부모와 형의 죄에 연좌돼 강화도로 쫓겨났고,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때 이원범의 나이는 11세였다.

이원범 집안의 불행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15세가 되던 1844년(헌종 10년), 맏형인 회평군(1827~1844)이 역모에 연루돼 사사되면서 이원범 역시 작은형과 함께 강화도로 쫓겨났다. 그런데 불과 4년 뒤, 바로 그 이원범을 왕으로 모시기 위한 봉영 행렬이 강화도로 향했다. 게다가 철종은 왕실 계보상 헌종보다 한 항렬 위의 왕족이었다. 왕위 계승의 계보가 한 세대 거슬러 올라간 것이다.

[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철종의 능에 16세기 석물이 들어선 까닭…‘강화도령’은 정말 무식한 왕이었을까
[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철종의 능에 16세기 석물이 들어선 까닭…‘강화도령’은 정말 무식한 왕이었을까

철종은 즉위 전 대부분의 생애를 한양에서 지냈다. 강화도에서 생활한 기간은 약 4년이었다. 그런데도 강화도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아온 ‘시골뜨기’, ‘일자무식’이라는 이미지가 훗날 철종을 설명하는 대표적인 수식어처럼 굳어졌다.

물론 철종이 왕실의 정규 교육을 충분히 받은 군주는 아니었다. 갑작스럽게 왕위에 오른 만큼 군주로서의 준비가 부족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교육의 부족과 지적 능력의 부족은 같은 말이 아니다.

조선시대 왕에게 글씨는 단순한 필적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왕이 직접 쓴 글씨, 즉 어필(御筆)은 왕의 교양과 품격을 보여주는 동시에 왕권의 상징이기도 했다. 철종의 글씨는 ‘강화도령’이라는 별명 하나로 그의 지적 능력까지 단정하는 것이 과연 옳은지 다시 생각하게 한다.

철종은 준비된 왕이 아니었다. 왕이 될 것이라고 생각해본 적도 없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왕이 됐다. 그리고 왕이 된 뒤에는 자신보다 훨씬 강력한 정치세력 속에서 국정을 운영해야 했다. 그의 비극은 어쩌면 바로 여기에 있었다.

1863년 12월, 철종은 32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묻힌 곳은 경기도 고양 서삼릉의 예릉(睿陵)이다. 그런데 철종의 예릉에는 또 하나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다.

예릉이 들어선 자리는 원래 중종의 정릉(靖陵)이 있던 자리였다. 1544년 세상을 떠난 중종은 처음에는 제1계비 장경왕후의 능인 희릉 곁에 묻혔다. 그러나 1562년(명종 17년), 문정왕후의 뜻에 따라 중종의 능은 지금의 서울 강남구 삼성동으로 옮겨졌고, 이때부터 정릉이라 불리게 됐다.

[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철종의 능에 16세기 석물이 들어선 까닭…‘강화도령’은 정말 무식한 왕이었을까
[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철종의 능에 16세기 석물이 들어선 까닭…‘강화도령’은 정말 무식한 왕이었을까

그로부터 약 300년이 지난 뒤 철종이 세상을 떠나자, 옛 정릉 터에 예릉이 조성됐다. 이 과정에서 옛 정릉의 석물 일부가 다시 활용됐다. 16세기에 만들어진 석물이 19세기 철종의 능에서 다시 쓰인 것이다.

물론 석물을 재활용한 것 자체를 철종에 대한 ‘홀대’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능역의 석물을 다시 활용하는 일 자체가 반드시 왕에 대한 의도적인 푸대접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강력한 세도정치 아래 왕권이 제약됐던 철종의 삶을 돌이켜보면, 예릉에 남아 있는 옛 석물은 그의 처지를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철종의 글씨를 다시 떠올려본다. ‘강화도령’이라는 이름 뒤에 가려져 있던 한 사람의 모습.

그는 왕이 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왕이었다. 그리고 자신보다 훨씬 강력한 정치세력에 둘러싸여 왕권을 제대로 행사하기 어려웠던 왕이기도 했다.

어쩌면 철종의 삶을 바라볼 때 우리가 먼저 기억해야 할 것은 ‘무식한 왕’이라는 평가가 아니라, 준비되지 않은 채 왕위에 올라 세도정치의 한가운데 놓였던 한 인간의 비극인지도 모른다.

철종의 삶을 ‘강화도령’, ‘무식한 왕’이라는 두 단어로 정리하는 것은 너무나 단순한 평가가 아닐까.

조수진 전 국회의원
조수진 전 국회의원

글 : 조수진 전 국회의원
- 제21대 국회의원(전 양천갑 당협위원장)
- 국민의힘 수석최고위원, 최고위원
- 제21대 국회 법제사법, 국회운영위원
- 동아일보 정치부 기자, 논설위원
- 채널A '직언직설' 앵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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