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조선 최초의 수렴청정 정희왕후 윤씨와 세조의 광릉(光陵)

기획·특집 | 조수진  기자 |입력

세조의 정치적 동반자에서 어린 손자의 왕위를 결정한 권력의 중심으로 성종 즉위 후 약 7년간 수렴청정…왕권 안정과 종친 세력 견제 동원이강릉과 회격 구조 등 조선 왕릉 제도의 변화를 보여주는 광릉

[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조선 최초의 수렴청정 정희왕후 윤씨와 세조의 광릉(光陵)
[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조선 최초의 수렴청정 정희왕후 윤씨와 세조의 광릉(光陵)

정희왕후 윤씨(貞熹王后 尹氏, 1418~1483)는 조선 최초로 수렴청정을 한 인물이다. 세조가 세상을 떠난 1468년 대비가 됐고, 1469년 손자 성종이 왕위에 오르자 수렴청정을 시작해 1476년까지 약 7년간 국정을 이끌었다.

정희왕후는 남편인 세조(수양대군) 못지않게 정치적 결단력이 강했던 인물로 전해진다. 계유정난(癸酉靖難) 당시 남편을 지지하고 독려했으며, 세조 사후에는 왕위 계승 과정에 직접 개입해 어린 손자를 왕위에 올렸다.

정희왕후 윤씨는 세종이 왕위에 오른 1418년, 파평 윤씨 윤번의 딸로 태어났다. 1428년 열 살 때 수양대군의 부인이 됐다.

선조 때 이조판서 등을 지낸 이기의 문집 『송와잡설(松窩雜說)』에는 수양대군의 부인을 간택하기 위해 감찰상궁이 정희왕후의 집을 찾아간 이야기가 나온다. 원래 궁궐에서 마음에 두었던 후보자는 정희왕후의 언니였는데, 열 살이던 정희왕후가 어머니 뒤에 숨어 어른들의 이야기를 듣다가 감찰상궁의 눈에 띄었다고 한다.

언니보다 정희왕후의 자태가 더 비범하다는 보고가 올라왔고, 결국 언니 대신 수양대군의 부인으로 간택됐다는 일화다.

정희왕후의 강단을 보여주는 일화는 또 있다. 계유정난이 일어난 1453년 음력 10월 10일, 수양대군을 따르던 일부 무사들이 거사 계획을 듣고 이탈했다. 수양대군은 화를 내며 안채로 들어갔다. 이때 정희왕후는 남편에게 갑옷을 입혀주면서 뜻을 꺾지 않도록 독려했다고 전해진다.

세조가 세상을 떠나자 정희왕후는 대비가 됐다. 그런데 세조에 이어 왕위에 오른 둘째 아들 예종마저 재위 1년 2개월 만에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예종의 아들 제안대군은 당시 네 살에 불과했다.

정희왕후는 예종의 승하 당일, 의경세자(훗날 덕종으로 추존)의 둘째 아들 자산군을 왕위 계승자로 결정했다. 선왕이 세상을 떠난 당일 후계자를 정하고 즉위 절차까지 진행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정희왕후는 아들을 잃은 슬픔 속에서도 신속하게 정국을 수습하고 왕위 계승 문제를 결정했다. 예종의 아들 제안대군이 있었지만 나이가 너무 어리다는 점이 고려됐다. 의경세자의 맏아들 월산대군도 왕위 계승 후보였으나 선택받지 못했다.

정희왕후는 결국 자산군을 선택했고, 그가 조선 제9대 왕 성종이 됐다. 이 과정에는 자산군의 장인 한명회의 영향력도 작용했다. 왕위 계승은 왕실의 혈통만으로 결정되지 않았다. 왕실 내부의 관계와 당시 정치세력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조선 최초의 수렴청정 정희왕후 윤씨와 세조의 광릉(光陵)
[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조선 최초의 수렴청정 정희왕후 윤씨와 세조의 광릉(光陵)

어린 성종을 대신해 수렴청정을 시작한 정희왕후는 왕권을 안정시키고 종친의 정치적 영향력을 제한하는 데 나섰다. 종친 가운데 강력한 세력을 형성했던 구성군(龜城君, 세종의 넷째 아들 임영대군의 아들)을 유배 보내고, 종친의 관직 진출을 제한하는 조치를 추진했다.

정희왕후는 국정 운영 과정에서 큰며느리인 소혜왕후(인수대비)와도 협력했다. 한문을 잘 모른다는 이유로 소혜왕후의 도움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지지만, 정희왕후는 단순히 다른 사람의 판단에 의존한 인물이 아니었다. 신숙주와 한명회 등 훈구 대신들과 협력하면서 주요 정책을 결정했다.

민생을 안정시키고 국가 운영을 정비하는 일에도 힘을 기울였다. 농잠업을 장려하고 각 지역의 산업 기반을 확충하려는 정책을 추진했다. 정희왕후의 수렴청정은 성종대에 각종 문물과 제도를 정비하는 데에도 영향을 미쳤다.

『경국대전』은 세조 때 편찬이 시작돼 성종 16년인 1485년에 완성·반포됐다. 정희왕후 윤씨는 성종 14년인 1483년 세상을 떠났다.

풍수지리에 관심이 높았던 세조는 생전에 자신의 묏자리를 정했고, 그것이 현재의 광릉이다. 광릉은 서울에서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다. 현재 경기도 구리에 있는 동구릉을 지나 한참을 더 가야 한다.

[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조선 최초의 수렴청정 정희왕후 윤씨와 세조의 광릉(光陵)
[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조선 최초의 수렴청정 정희왕후 윤씨와 세조의 광릉(光陵)

조선을 건국한 태조의 건원릉을 비롯해 문종의 현릉이 자리한 곳이 동구릉이다. 적통인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세조가 이곳에 자신의 능을 조성하지 않은 배경에는 왕위 계승을 둘러싼 정치적 상황도 작용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세조는 맏아들 의경세자가 세상을 떠났을 때도 동구릉이 아닌 다른 곳에 묏자리를 정했다. 직접 길지를 물색하고 답사해 정한 곳이 오늘날의 서오릉이다.

광릉에는 중앙에 정자각이 하나 있고, 그 뒤 좌우 언덕에 세조와 정희왕후의 능침이 각각 자리 잡고 있다. 왕과 왕비의 능침을 서로 다른 언덕에 조성하고 제향 공간은 하나로 운영하는 방식이다.

정자각 앞에서 바라보면 서쪽 언덕에 세조의 능침이, 동쪽 언덕에 정희왕후의 능침이 있다. 이처럼 같은 능역 안에서 서로 다른 언덕에 능침을 조성하는 방식을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이라 한다. 광릉은 이러한 형식이 처음 적용된 조선 왕릉이다.

[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조선 최초의 수렴청정 정희왕후 윤씨와 세조의 광릉(光陵)
[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조선 최초의 수렴청정 정희왕후 윤씨와 세조의 광릉(光陵)

광릉은 다른 조선 왕릉과 비교해 독특한 점이 많다. 세조는 생전에 자신이 죽으면 빨리 썩어야 한다며 석실과 석곽을 만들지 말고 병풍석도 세우지 말라는 뜻을 남겼다. 왕릉을 조성하는 데 드는 비용과 인력을 줄이려는 의도였다.

세조의 뜻에 따라 능 내부는 석실 대신 회격으로 조성됐다. 회격은 석회와 가는 모래, 황토 등을 섞어 다져 만드는 방식이다. 병풍석은 생략했고, 십이지신상은 난간석에 새겼다. 석실 대신 회격을 사용하고 병풍석을 생략한 것은 이후 조선 왕릉 제도에 영향을 미쳤다.

광릉은 홍살문에서 정자각으로 이어지는 참도에 일반적인 왕릉과 달리 박석이 깔려 있지 않은 점도 눈에 띈다. 소나무보다 전나무가 눈에 띄게 많은 것도 광릉의 특징이다. 광릉 입구에는 조선 왕릉 가운데 현존하는 유일한 하마비가 남아 있다. 하마비는 이곳이 신성한 장소이므로 말에서 내려 걸어가라는 뜻을 전하는 비석이다.

세조는 왕권 강화와 법제 정비를 추진한 군주였다. 『경국대전』 편찬의 출발점을 마련했고, 직전법과 호패법, 군사제도 개편 등을 통해 국가 운영 체계를 정비했다. 그러나 그가 남긴 업적과 별개로 조카의 왕위를 빼앗고 왕위에 오른 숙부라는 역사적 낙인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광릉의 두 능침은 조선 왕실의 권력과 계승의 역사를 함께 보여준다. 세조가 왕위를 차지하는 과정에서 정희왕후는 남편의 정치적 동반자였고, 세조 사후에는 어린 손자의 왕위를 결정한 권력의 중심에 섰다. 광릉은 두 사람의 무덤인 동시에, 왕권을 둘러싼 선택과 결단이 남긴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조수진 전 국회의원
조수진 전 국회의원

글 : 조수진 전 국회의원
- 제21대 국회의원(전 양천갑 당협위원장)
- 국민의힘 수석최고위원, 최고위원
- 제21대 국회 법제사법, 국회운영위원
- 동아일보 정치부 기자, 논설위원
- 채널A '직언직설' 앵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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