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연산군금표비에서 만난 폭군의 흔적...지도자의 용서와 화해

기획·특집 | 조수진  기자 |입력

왕의 사냥터에 무단 침입하면 참형…금표비에 남은 연산군의 폭정 어머니의 죽음에 얽힌 원한, 무오사화와 갑자사화로 이어진 비극 상처를 복수로 되갚을 것인가, 용서와 화해로 넘어설 것인가

[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연산군금표비에서 만난 폭군의 흔적...지도자의 용서와 화해
[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연산군금표비에서 만난 폭군의 흔적...지도자의 용서와 화해

단경왕후 신씨(端敬王后 愼氏)의 온릉(溫陵)을 나와 고양시 벽제 쪽으로 향하던 길이었다. 8km쯤 왔을까.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일대에서 ‘연산군금표비(燕山君禁標碑)’라는 이정표를 만났다. 최영 장군 묘역과도 가까운 곳이다.

이정표를 따라 연산군금표비를 따라갔다. 연산군금표비는 연산군이 사냥과 유흥을 즐기던 곳에 일반인의 출입을 금지하기 위해 세운 비석이다. 고양시 대자동 한적한 곳에 서 있는 연산군금표비는 세월의 풍상을 겪어서인지 초라해 보였다.

높이 147㎝, 가로 55㎝, 두께 23㎝의 화강암으로, 앞면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새겨져 있다.

‘금표내범입자논기훼제서율처참(禁標內犯入者論棄毁制書律處斬)’

금표 안으로 무단 침입하는 자는 왕명을 훼손한 죄에 해당하는 법률에 따라 참형에 처한다는 뜻이다. 왕의 사냥터에 들어왔다는 이유로 목숨까지 빼앗겠다는 것이다. 이 비석 하나만으로도 연산군의 폭정과 당시의 시대상을 짐작할 수 있다.

연산군은 금표 구역을 도성 밖으로까지 확대했다. 백성들은 삶의 터전을 잃고 출입을 통제당했다. 연산군금표비는 중종반정 이후 대부분 파괴되거나 땅속에 묻힌 것으로 전해진다.

현재까지 확인된 연산군 시대의 금표비는 고양시 대자동의 것이 유일하다. 이 비석은 1980년대 대자동 일대 왕족 묘역을 정비하던 과정에서 발견됐다. 처음에는 다른 석물들과 함께 묘역 앞에 세워졌으나, 1990년대에 이르러 연산군 시대의 금표비라는 사실이 확인됐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본다.

한양에서 의주까지 이어지는 길을 의주대로(義州大路)라 했다. 한양의 돈의문(敦義門), 즉 서대문에서 출발해 무악재와 구파발을 거쳐 고양, 파주, 개성, 평양을 지나 의주까지 이어졌다. 432㎞, 1080리에 이르는 길이었다. 의주를 지나면 중국 베이징으로도 연결됐다. 오늘날의 국도와 일부 구간에서 그 옛길의 흔적을 떠올릴 수 있다.

당시 고양군은 한양과 의주를 잇는 길목에 자리했다. 왕들이 사냥을 즐기기에도 좋은 곳이었다. 연산군은 1504년(연산군 10년) 고양군을 자신의 유흥과 사냥을 위한 공간으로 삼아 민간인의 출입을 통제했다. 고을 자체가 왕의 놀이터로 변한 셈이다. 1506년 중종반정 이후에야 고양군은 다시 본래의 행정구역으로 돌아왔다.

연산군금표비가 발견된 묘역의 사연도 비극적이다. 이 일대에는 태종의 후손인 우산군(牛山君) 이종(李踵)과 그 아들들의 묘역이 있다. 이들은 갑자사화와 연산군 말기의 숙청 과정에서 참혹한 일을 겪었다. 우산군의 아들인 무풍군은 1504년 능지처참을 당했고, 우산군과 다른 아들들도 유배된 뒤 1506년 사사됐다. 금표비 주변의 왕족 묘역은 권력이 혈족에게까지 얼마나 무자비하게 행사됐는지를 보여준다.

연산군(燕山君, 1476~1506)은 분명 폭군이었다. 그러나 그의 삶을 돌아보면 씁쓸한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그의 어머니 폐비 윤씨(廢妃 尹氏, ?~1482)는 남편 성종(成宗)에 의해 폐위된 뒤 사약을 받고 죽었다. 연산군은 자신을 돌보던 정현왕후(중종의 어머니)를 어머니로 알고 자랐다.

생모 폐비 윤씨의 폐위와 죽음에 얽힌 사연은 왕위에 오른 뒤에야 알게 됐다. 자신을 낳은 어머니가 폐위되고 사약을 받아 죽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을 때, 그의 마음에는 어떤 원망과 분노가 자리했을까. 그 비극이 그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지 생각하면 안타까움이 남는다. 물론, 그렇다고 폭정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연산군은 어머니의 죽음에 얽힌 원한을 풀려다 무오사화와 갑자사화를 일으켜 수많은 선비와 신하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왕권을 사유화하고 사치와 향락에 빠졌으며, 백성의 삶을 돌보지 않았다. 금표비는 왕의 개인적인 욕망이 백성의 삶을 어떻게 짓밟았는지 보여주는 상징이다.

결국 1506년 중종반정이 일어나 연산군은 왕위에서 쫓겨났다. 조선 최초의 반정이었다. 연산군은 어머니의 원한을 풀려 했지만 더 많은 원한을 남겼다. 자신의 상처를 다른 이들에게 되돌려주었고, 끝내 자신도 파멸의 길을 걸었다.

연산군의 비극을 돌아보며 새삼 생각한다.

지도자의 위대함은 자신이 겪은 아픔과 원한을 얼마나 절제하고, 대립과 갈등을 넘어 더 큰 화해와 통합으로 나아가느냐에 있는 것이 아닐까.

자신이 어려움을 겪을 때 자신을 괴롭히고 상처를 준 사람들을 용서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상처를 되갚는 것은 쉽지만, 상처를 넘어서는 것은 어렵다. 복수는 또 다른 원한을 낳기 쉽지만, 용서와 화해는 함께 살아갈 길을 열어준다.

연산군의 삶은 오늘날에도 우리에게 묻는다. 상처를 받은 사람이 권력을 가졌을 때, 그 권력으로 복수할 것인가, 아니면 화해의 길을 열 것인가.

연산군금표비 앞에서 폭군의 흔적을 마주하며, 지도자의 진정한 무게는 자신에게 주어진 권력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수진 전 국회의원
조수진 전 국회의원

글 : 조수진 전 국회의원
- 제21대 국회의원(전 양천갑 당협위원장)
- 국민의힘 수석최고위원, 최고위원
- 제21대 국회 법제사법, 국회운영위원
- 동아일보 정치부 기자, 논설위원
- 채널A '직언직설' 앵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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