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7일의 왕비, 온릉에 잠든 단경왕후(端敬王后) 신씨

기획·특집 | 조수진  기자 |입력

중종반정 7일 만에 폐출된 왕비, 스무 살에 맞은 이별 친정의 몰락과 51년의 세월 끝에 이뤄진 왕후 복위 양주 온릉에 남은 단출한 석물과 치마바위에 얽힌 이야기 ‘7일의 왕비’ 단경왕후(端敬王后) 신씨(1487~1557)

[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7일의 왕비, 온릉에 잠든 단경왕후 신씨
[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7일의 왕비, 온릉에 잠든 단경왕후 신씨

단경왕후 신씨는 신수근(愼守勤)과 청원부부인 한씨의 딸로 태어났다. 할아버지 신승선(愼承善)은 세종의 넷째 아들 임영대군의 사위이자 연산군의 장인이었고, 아버지 신수근은 좌의정이자 연산군의 처남이었다.

1499년(연산군 5년), 단경왕후 신씨는 13세의 나이로 연산군의 이복동생 진성대군(晉城大君)과 혼인했다. 즉, 단경왕후는 연산군의 부인인 거창군부인 신씨(1476~1537)와 고모와 조카 사이였던 것이다.

1506년 9월, 연산군을 폐위하려는 반정군이 진성대군의 집을 에워쌌다. 진성대군은 반정군이 자신을 죽일 것이라 지레짐작하고 자결하려고 했다. 신씨는 남편의 소맷자락을 붙들고 말렸다.

“에워싼 군사의 말머리가 집을 향해 있으면 우리는 죽어야 합니다. 말머리가 궁궐을 향해 있다면 호위하는 겁니다.”

하지만 반정 끝에 즉위한 남편 중종과 달리 신씨의 운명은 급전직하했다. 연산군의 매부이기도 했던 신씨의 아버지 신수근이 반정에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마도 신수근은 불확실한 사위보다는 확실한 권력인 매부 연산군을 택한 것으로 보인다. 반정세력은 신수근의 마음을 돌릴 수 없다고 판단했고, 그를 제거했다. 신수근의 아우인 유수 신수겸(愼守謙)과 판서 신수영(愼守英)도 모두 죽임을 당했다.

반정세력은 신씨의 폐출을 요구했다. 반정 덕분에 창졸간에 왕이 된 중종은 어쩔 줄 몰라 했다. 중종은 “조강지처를 어찌하겠느냐”고 호소했지만, 반정공신들은 “종묘사직의 큰일인데 어쩔 수 없다”고 재촉했다. 중종은 힘이 없었다.

[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7일의 왕비, 온릉에 잠든 단경왕후 신씨
[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7일의 왕비, 온릉에 잠든 단경왕후 신씨

단경왕후 신씨는 중종반정이 성공한 9월 2일로부터 불과 7일 뒤인 9월 9일 폐출되었다.

신씨는 반정의 최대 피해자였다. 집안은 멸문지화를 당했고, 남편과는 강제로 헤어져 궁궐에서 쫓겨났다. 그때 신씨의 나이는 스무 살이었다.

신씨의 복위가 논의되기도 했다. 1515년(중종 10년), 장경왕후 윤씨가 인종을 낳고 산후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신씨를 복위시켜야 한다는 상소가 올라왔다. 그러나 신료들이 끝까지 반대하면서 복위는 무산됐다.

신씨는 친정에서 지내며 독수공방하다가 명종 12년(1557년), 7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 친정인 거창 신씨의 선산인 현재의 자리,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일영리에 묻혔다. 생전에는 ‘폐비신씨지묘(廢妃愼氏之墓)’라고 새겨진 표석이 있었다고 한다.

영조 15년(1739년)에 왕후로 복위됐고, 단경왕후라는 시호를 받았다.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예(禮)로써 공경하고 의(義)로써 조심하였던 그녀의 품성이 담긴 시호다. 능호는 온릉(溫陵)이라 했다.

스무 살에 폐출된 뒤 51년 동안 남편 중종과 헤어져 살아야 했던 신씨. 죽어서라도 따뜻함을 간직하라는 의미에서 능호를 온릉이라 했을까.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일영리 온릉을 찾았다. 온릉은 조선 왕릉 42기 가운데 양주에 있는 유일한 왕릉이다. 신씨가 거창 신씨의 선산에 묻혔기 때문이다.

[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7일의 왕비, 온릉에 잠든 단경왕후 신씨
[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7일의 왕비, 온릉에 잠든 단경왕후 신씨

복위된 왕비의 능이기에 온릉의 석물 배치는 단출하다. 능침을 둘러싸는 병풍석과 난간석, 무석인은 생략됐다. 석양과 석호도 한 쌍씩만 배치돼 있다.

정자각 왼쪽에 있어야 하는 수라간(제례에 필요한 음식을 준비하는 공간)과 오른쪽에 배치되는 수복방(왕릉 관리자가 머무는 공간) 모두 없어지고 수복방 터만 남아 있다. 조선왕릉은 2009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지만, 온릉은 군사시설 보호구역에 둘러싸여 있어 2019년 11월에야 일반에 공개됐다.

[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7일의 왕비, 온릉에 잠든 단경왕후 신씨
[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7일의 왕비, 온릉에 잠든 단경왕후 신씨

온릉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인왕산 치마바위의 구전이 떠오른다. 강제로 헤어진 뒤 중종이 경회루에 올라 인왕산 기슭을 바라보자, 단경왕후가 자신이 입던 붉은 치마를 인왕산 바위에 펼쳐 놓아 무사함을 알렸다는 ‘치마바위’ 이야기다.

실록에는 단경왕후가 폐출된 뒤 어디서 살았는지에 대한 기록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신수근의 집은 소의문 안, 지금의 서소문 일대에 있었다고 기록돼 있어 일반적으로 알려진 인왕산 쪽 사가의 위치에 대한 사실적 근거는 확인하기 어렵다.

비록 야사나 민담에 가깝다 할지라도, 정치적 권력 투쟁 속에서 생이별을 당해야 했던 신씨의 그리움과 아픔을 짐작할 수 있는 이야기다.아버지 신수근도 영조 때 복권됐다. 신수근의 묘 역시 온릉 근처에 있다. 부녀의 묘가 서로 마주 보고 있는 형세다.

온릉은 관람료가 없고 주차장도 무료다. 아마도 더 많은 이들이 찾아와 온기를 나누기를 바라기 때문은 아닐까.

조수진 전 국회의원
조수진 전 국회의원

글 : 조수진 전 국회의원
- 제21대 국회의원(전 양천갑 당협위원장)
- 국민의힘 수석최고위원, 최고위원
- 제21대 국회 법제사법, 국회운영위원
- 동아일보 정치부 기자, 논설위원
- 채널A '직언직설' 앵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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