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파주 삼릉에 나란히 누운 한명회의 두 딸

기획·특집 | 조수진  기자 |입력

한명회의 권력과 왕실 혼인으로 이어진 두 자매의 짧은 생애 세자빈의 묘에서 왕릉으로 승격된 공릉과 왕비의 능으로 조성된 순릉 권력의 절정에 올랐던 한명회의 영화와 몰락, 파주 삼릉에 남은 역사의 흔적

[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파주 삼릉에 나란히 누운 한명회의 두 딸
[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파주 삼릉에 나란히 누운 한명회의 두 딸

한명회(韓明澮·1415~1487)는 조선 전기 정치사에서 가장 강력한 권신(權臣) 가운데 한 사람이다. 1453년 수양대군이 정권을 장악한 계유정난(癸酉靖難)에서 수양대군의 핵심 참모로 활약하며 정치 전면에 등장했다. 어린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세조의 정권 장악 과정에서 한명회는 수양대군을 도운 핵심 인물이었다.

한명회는 고려 말부터 이어온 명문가 출신이었다. 할아버지는 예문관제학을 지낸 한상질(韓尙質)이었다. 그러나 부모를 일찍 여읜 한명회는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고, 과거에도 번번이 실패했다. 1452년 문음(門蔭)으로 경덕궁직(景德宮直)이 되면서 비로소 벼슬길에 들어섰다. 이후 권람의 주선으로 수양대군에게 접근했고, 계유정난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며 급격히 출세했다.

한명회는 계유정난 이후 정난공신 1등에 올랐고, 세조 즉위 뒤에도 좌익공신 1등, 익대공신 1등, 좌리공신 1등에 책록되는 등 모두 네 차례 1등 공신이 됐다. 1466년에는 영의정에 올랐다. 세조가 그를 두고 자신의 장량(張良)이라고 부를 정도였다.

그러나 한명회는 공신에 머물지 않았다. 그가 권력의 정점으로 올라가는 데에는 왕실과의 혼인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셋째 딸은 예종의 왕비 장순왕후(章順王后)가 됐고, 넷째 딸은 성종의 첫 왕비 공혜왕후(恭惠王后)가 됐다. 한명회는 두 왕의 장인이 된 유일한 인물이다.

장순왕후 한씨는 세조의 둘째 아들 해양대군이 세자로 책봉되면서 세자빈이 됐다. 1460년 세자빈에 책봉된 뒤 이듬해 인성대군(仁城大君)을 낳았지만 출산 뒤 병을 얻어 17세의 어린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인성대군 역시 세 살의 나이로 일찍 죽었다.

장순왕후가 세상을 떠났을 때의 신분은 왕비가 아니라 세자빈이었다. 처음에는 세자빈의 묘로 조성됐고, 훗날 성종이 즉위한 뒤인 1470년 장순왕후로 추존되면서 능으로 승격돼 공릉(恭陵)이라는 능호를 받았다.

예종이 즉위한 지 불과 13개월 만에 세상을 떠나자, 세조비 정희왕후는 의경세자의 둘째 아들이자 한명회의 사위인 자산군으로 하여금 왕위를 잇게 한다. 성종이다. 예종과 계비 안순왕후의 네살배기 아들 제안대군과 의경세자의 장남 월산대군을 건너뛴 것이다.

한명회의 넷째 딸 한씨는 성종이 즉위하면서 왕비가 됐고, 훗날 공혜왕후라는 시호를 받았다. 그러나 공혜왕후 역시 오래 살지 못했다. 1456년에 태어나 성종이 왕위에 오른 1469년 왕비가 됐지만, 1474년 1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자식은 없었다.

[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파주 삼릉에 나란히 누운 한명회의 두 딸
[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파주 삼릉에 나란히 누운 한명회의 두 딸

성종은 세상을 떠난 공혜왕후의 능을 언니 장순왕후의 공릉 가까이에 조성했다. 이것이 순릉(順陵)이다. 경기도 파주시 조리읍 삼릉(坡州三陵)에는 세 개의 능이 있다. 예종의 첫 왕비 장순왕후의 공릉(恭陵), 성종의 첫 왕비 공혜왕후의 순릉(順陵), 그리고 영조의 장자 효장세자(孝章世子)의 영릉(永陵)이다.

장순왕후는 세자빈으로, 공혜왕후는 왕비로, 효장세자는 세자로 세상을 떠났다. 파주 삼릉 가운데 순릉만이 왕비의 능으로 조성된 왕릉 형식을 갖추고 있다. 파주라는 지명의 유래도 왕실과 연결된다. 세조 때 세조비 정희왕후(貞熹王后) 윤씨의 본관인 파평(坡平)의 ‘파(坡)’자를 따서 원평도호부를 파주목으로 승격하고 이름을 파주로 고쳤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파주 삼릉으로 향한다. 재실을 지나 숲길을 따라 공릉으로 향한다. 초가을의 숲은 이미 계절을 바꾸고 있다. 갈참나무와 졸참나무 잎이 조금씩 노랗게 물들기 시작하고, 발밑에는 도토리가 수북하게 떨어져 있다.

장순왕후의 공릉은 숲 속에 조용히 자리 잡고 있다. 왕릉이라고 하기에는 어딘가 소박하다. 장순왕후가 처음 이곳에 묻혔을 때의 신분이 세자빈이었기 때문이다. 병풍석과 난간석, 망주석이 없고 석물도 왕릉에 비해 간소하다. 특히 문석인은 있지만 무석인(武石人)은 없다. 죽음 당시의 신분이 능의 모습에 흔적으로 남은 것이다.

[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파주 삼릉에 나란히 누운 한명회의 두 딸
[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파주 삼릉에 나란히 누운 한명회의 두 딸

공릉에서 순릉으로 걸음을 옮긴다. 숲길은 고즈넉하다. 작은 언덕과 골짜기를 사이에 두고 두 자매의 능이 마주 보고 있다. 공혜왕후는 왕비의 신분으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순릉은 처음부터 왕릉의 형식으로 조성됐다. 난간석과 망주석을 비롯해 왕릉의 석물 체계를 갖췄다. 공릉과 비교하면 그 차이가 뚜렷하다.

장순왕후와 공혜왕후는 친정 자매인 동시에 시가 쪽으로는 숙모와 질부(조카며느리) 사이였다. 아버지 한명회에게 두 딸은 왕실과의 혼인을 통해 자신의 권력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어주는 존재였을 것이다. 하지만 딸들의 삶은 너무 짧았다. 두 딸 모두 10대에 세상을 떠났다. 두 자매는 자신들의 혼인을 어떻게 생각했을까. 아버지가 자신들을 왕실로 시집보내며 품었던 야심을 알고 있었을까.

한명회의 말년은 권신의 영화와는 사뭇 달랐다. 그는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자신의 호(號)인 ‘압구(狎鷗)’를 따서 압구정(狎鷗亭)을 지었다. ‘갈매기와 가까이 지낸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 정자는 훗날 한명회의 정치적 몰락을 상징하는 장소가 된다.

[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파주 삼릉에 나란히 누운 한명회의 두 딸
[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파주 삼릉에 나란히 누운 한명회의 두 딸

1481년 명나라 사신이 압구정을 구경하려 하자 한명회는 정자가 좁다고 말하며 만류했지만, 사신은 가겠다고 했다. 한명회는 정자 옆에 궁중에서 쓰는 장막을 설치해 공간을 넓혀달라고 요청했다. 성종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고, 이후 한명회는 불쾌한 기색을 보였다는 이유로 사헌부의 추국을 받았다. 압구정 사건은 왕권 앞에서 예외가 될 수 없음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죽은 뒤에도 한명회의 운명은 평탄하지 않았다. 1504년 연산군 때 갑자사화(甲子士禍)가 일어나자 한명회는 연산군의 생모 폐비 윤씨의 폐출과 관련된 인물로 지목됐다. 이미 죽은 사람이었지만 무덤이 파헤쳐지고 시신의 목이 베이는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했다.

조선 최고의 권력가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한명회. 그가 생전 꿈꾸었던 것은 권력의 절정이었을 것이다. 두 딸을 왕비로 만들었고, 두 왕의 장인이 되었으며, 네 차례나 1등공신에 올랐고, 영의정까지 지냈다.

그러나 파주 삼릉에 와서 마주하는 것은 화려한 권력의 흔적이 아니다. 권서여무(權逝如霧). 권력은 안개와 같아서 손에 쥔 듯하다가도 어느 순간 흔적 없이 사라지는 것이다. 한명회가 생전에 누렸던 권세도 그러했다.

조수진 전 국회의원
조수진 전 국회의원

글 : 조수진 전 국회의원
- 제21대 국회의원(전 양천갑 당협위원장)
- 국민의힘 수석최고위원, 최고위원
- 제21대 국회 법제사법, 국회운영위원
- 동아일보 정치부 기자, 논설위원
- 채널A '직언직설' 앵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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