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강남 빌딩 숲에 홀로 잠든 왕, 중종

기획·특집 | 조수진  기자 |입력

중종반정으로 왕위에 올랐지만 세 왕비와 엇갈린 운명… 끝내 홀로 잠든 왕 임진왜란에 파헤쳐진 왕릉, 강남 빌딩 숲에 남은 500년 역사의 흔적

조수진 전 국회의원이 역사와 문화유산, 예술과 자연이 깃든 공간을 직접 찾아 그곳에 담긴 시대의 흔적과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한다. 현장에서 발견한 역사적 의미를 오늘의 시선으로 풀어내는 기획 연재를 통해 익숙한 공간에 숨겨진 새로운 이야기를 만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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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강남 빌딩 숲에 홀로 잠든 왕, 중종
[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강남 빌딩 숲에 홀로 잠든 왕, 중종

중종(中宗 1488~1544년)은 성종(成宗)의 둘째 아들로, 연산군(燕山君)의 이복동생이다. 진성대군(晉城大君)에 봉해졌고, 1506년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연산군이 폐위되자 왕위에 올랐다.

왕도정치(王道政治)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했지만 조광조의 개혁은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좌절됐고, 이후 중종의 정치는 훈구세력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1544년 57세로 창경궁에서 승하했다.

중종에게는 세 명의 왕비가 있었다.

첫 번째 부인은 단경왕후(端敬王后) 신씨다. 단경왕후의 아버지 신수근은 연산군의 처남이자 중종반정에 반대했던 인물이었다. 반정 세력은 신수근을 처단했고, 단경왕후 역시 중종의 왕비가 된 지 7일 만에 폐출됐다.

단경왕후는 복위하지 못한 채 1557년(명종 12년) 71세로 세상을 떠났다. 처음에는 경기도 양주에 묻혔으나, 1739년(영조 15년) 복위되면서 능호(陵號)를 온릉(溫陵)이라 했다.

두 번째 왕비는 장경왕후(章敬王后) 윤씨다. 후궁이었던 윤씨는 단경왕후가 폐출된 뒤 왕비로 책봉됐다. 그러나 1515년 인종(仁宗)을 낳은 뒤 산후병으로 출산 엿새 만에 세상을 떠났다. 25세였다.

장경왕후의 능은 처음에 현재 서울 서초구 내곡동 헌릉(獻陵) 부근에 조성됐다. 그러나 권신 김안로가 풍수 문제를 제기하면서 능을 옮겨야 한다는 논의가 일었고, 결국 고양의 서삼릉(西三陵)으로 천릉(遷陵)됐다. 지금의 희릉(禧陵)이다.

조강지처는 지키지 못했고, 두 번째 왕비의 능은 옮겨졌다.

세 번째 왕비는 문정왕후(文定王后) 윤씨다. 문정왕후는 훗날 조선 왕실 여성 가운데 가장 강력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한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 된다. 중종 말년부터 명종대까지 문정왕후의 영향력은 막강했다.

중종은 장경왕후의 능을 천릉(遷陵)할 당시 자신의 능자리도 미리 정해두었다. 희릉 옆에 자신의 능을 조성해 장경왕후와 함께 묻히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중종이 세상을 떠난 뒤 그의 능은 지금의 강남구 삼성동으로 옮겨졌다. 성종의 선릉(宣陵) 가까이에 조성된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정릉(靖陵)이라 부르는 능이다.

[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강남 빌딩 숲에 홀로 잠든 왕, 중종
[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강남 빌딩 숲에 홀로 잠든 왕, 중종

중종과 장경왕후의 능이 나란히 놓이지 않게 된 과정에는 문정왕후의 뜻이 작용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문정왕후가 남편인 중종과 자신이 함께 묻힐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풍수(風水)를 명분으로 능을 옮겼다는 것이다.

그러나 문정왕후가 기대했던 일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중종의 정릉(靖陵) 일대는 지대가 낮아 비가 많이 오면 물이 차는 일이 잦았다.

문정왕후는 1565년(명종 20년) 65세로 세상을 떠났다. 남편인 중종 곁에 묻히기를 원했지만, 정릉의 지형과 침수 문제 때문에 결국 중종 곁에 묻히지 못했다. 문정왕후는 서울 노원구 공릉동의 태릉(泰陵)에 묻혔다.

왕비가 셋이었지만 중종은 홀로 누웠다. 세 왕비의 능이 한 왕릉군 안에 자리한 숙종과 대비되는 모습이다.

지하철을 타고 강남의 선릉(宣陵)과 정릉(靖陵)으로 향한다. 고층 건물이 빽빽하게 들어선 서울 강남 한복판에 조선 왕릉 세 기가 숲속에 자리하고 있다. 선릉(宣陵)과 정릉(靖陵)은 도심 속의 녹색 섬과 같다.

선릉과 정릉의 면적은 240,589㎡, 평으로 환산하면 약 7만2,800평이다. 입구로 들어선다. 서북쪽으로 보이는 것이 성종의 선릉(宣陵)이다.

매표소 왼쪽 산책로를 따라 걷는다. 소나무와 참나무가 울창하고, 산책길 옆으로는 도랑이 흐른다. 재실(齋室)을 지나면 관리사무소를 겸한 선정릉 역사문화관이 나온다. 그 왼쪽에는 수령 500년을 훌쩍 넘긴 은행나무 거목이 서 있다. 선릉의 수호수(守護樹)처럼 느껴진다.

성종의 능은 능침(陵寢) 가까이까지 걸어 올라갈 수 있다. 왕을 보좌하는 문인의 모습으로 조각된 문석인과 무장 형상의 무석인, 그리고 말과 양을 형상화한 석물들이 강남의 빌딩을 바라보고 서 있다. 도심 한복판인데도 능침 주변에는 고요함이 감돈다.

선릉의 자리는 본래 세종(世宗)의 아들 광평대군(廣平大君)의 묘역이었다. 성종의 장례가 치러진 1495년 광평대군의 묘는 현재의 강남구 수서동 일대로 옮겨졌다.

성종의 선릉에서 숲길을 따라가면 정현왕후(貞顯王后)의 능이 나온다. 정현왕후는 성종의 계비(繼妃)이자 중종의 친어머니다. 정현왕후의 능은 성종의 선릉과 다른 봉우리에 조성되어 있다. 한 능역 안에 두 개의 언덕을 이루며 왕과 왕비의 능을 따로 조성한 형태다. 이를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이라 한다.

[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강남 빌딩 숲에 홀로 잠든 왕, 중종
[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강남 빌딩 숲에 홀로 잠든 왕, 중종

정현왕후의 능으로 가는 길에는 초록 나무 사이로 파란 하늘이 빛난다. 능은 소나무 숲으로 둘러싸여 있다.

정현왕후의 능을 지나 오른쪽으로 걸으면 중종이 잠든 정릉(靖陵)이다. 어머니 정현왕후의 능에서 아들 중종의 정릉으로 이어지는 길. 왕릉을 찾아 걷는 길이면서 한 어머니와 아들의 삶을 따라가는 길이기도 하다.

선릉과 정릉을 둘러보다 보면 임진왜란(壬辰倭亂)의 흔적을 만나게 된다. 임진왜란이 한창이던 1593년 4월, 왜군이 선릉과 정릉을 파헤쳤다는 보고가 조정에 올라왔다.

성종과 정현왕후의 관(棺)은 비어 있었다. 중종의 관에는 시신이 있었지만, 그 시신이 중종인지 확인할 수 없었다. 원로 대신과 종친은 물론 환관(宦官)과 궁녀들까지 불려와 시신을 확인했지만 끝내 신원을 확정하지 못했다.

결국 의대(衣襨), 즉 왕이 생전에 입던 옷을 다시 묻고, 신원을 확인하지 못한 시신은 능 주변에 따로 매장했다. 전쟁은 죽은 왕의 무덤까지 파헤쳤다.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중종은 살아서도 자신의 뜻대로 나라를 이끌기 어려웠고, 죽어서도 편안히 한자리에 머물지 못했다. 첫 번째 왕비는 왕비 자리에서 쫓겨났고, 두 번째 왕비의 능은 천릉(遷陵)됐다. 세번째 왕비는 남편 곁에 묻히기를 원했지만 결국 홀로 잠들었다.

중종은 세 왕비 가운데 누구와도 함께하지 못했다. 능은 옮겨졌고, 전란은 능침을 파헤쳤다. 왕위에 오른 뒤에도 훈구(勳舊)와 사림(士林), 외척(外戚)과 신하들 사이에서 끊임없이 흔들렸던 중종. 그의 마지막 자리까지도 순탄하지 않았다.

강남의 빌딩 숲 사이, 소나무와 참나무가 둘러싼 정릉(靖陵)에 서서 생각한다. 중종은 왕이었지만, 어쩌면 자신의 삶에서조차 온전히 주도권을 쥐지 못했던 왕인지도 모른다.

500년이 지난 오늘, 그의 능 앞에는 지하철이 지나가고 고층빌딩이 솟아 있다.

조수진 전 국회의원
조수진 전 국회의원

글 : 조수진 전 국회의원
- 제21대 국회의원(전 양천갑 당협위원장)
- 국민의힘 수석최고위원, 최고위원
- 제21대 국회 법제사법, 국회운영위원
- 동아일보 정치부 기자, 논설위원
- 채널A '직언직설' 앵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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