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사도세자의 비극과 정조의 효심, 융릉에 담긴 이야기](https://cdn.www.jachiuijeong.co.kr/w900/q75/article-images/2026-11-07/1b9ae84e-3780-4f6e-8a3a-cb2ec91b0904.png)
사도세자(思悼世子 1735~1762)의 무덤은 경기도 양주 배봉산 일대(현재의 서울 동대문구)에 있었다. 원래 이름은 수은묘(垂恩墓)였다.
조선시대 무덤은 왕과 왕비의 경우 능(陵), 왕세자와 왕세자빈, 왕의 사친 등의 경우 원(園)으로 칭했다. 그 밖의 왕족과 일반인의 경우 묘(墓)라고 구별했기 때문에 사도세자의 무덤은 수은묘가 됐다.
1776년 왕위에 오른 정조(正祖, 1752~1800)는 즉위한 직후 사도세자의 시호를 장헌세자(莊獻世子)로 올리고, 무덤의 격을 높여 영우원(永祐園)이라고 했다.
정조는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라면서 "선대왕(영조)께서 내게 효장세자를 이어받도록 명하셨지만, 전일 선대왕께 올린 글에서 '근본을 둘로 하지 않는 것(不貳本)'에 관한 내 뜻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했다.
(〈정조실록〉 1776년 3월 10일)
효장세자(孝章世子, 1719~1728)는 영조(英祖, 1694~1776)의 장남이자 사도세자의 이복형으로, 아홉 살에 요절했다. 영조는 왕통의 정통성에 관한 논란을 피하기 위해 세손(정조)을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적시켰다.
정조의 '근본을 둘로 하지 않는다'는 말은 영조의 명에 따라 효장세자의 양자가 됐지만, 자신의 뿌리는 사도세자임을 잊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재위 13년째인 1789년, 정조의 고모부인 금성위 박명원(朴明源, 1725~1790)이 영우원을 옮겨야 한다고 상소했다.
1786년(정조 10년) 5월 장자 문효세자(文孝世子, 1782~1786)가 세상을 떠났고, 같은 해 9월 문효세자의 생모인 후궁 의빈 성씨(宜嬪 成氏, 1753~1786)와 태아도 세상을 떠나면서 정조는 왕위를 이을 아들이 없는 상황이었다.
정조는 답했다.
“내가 수원에 뜻을 둔 것이 이미 오래이며 널리 상고하고 자세히 살핀 것이 몇 년인지 모른다. (중략) 옥룡자가 말하기를, ‘똬리를 튼 용이 여의주를 가지고 노는 형국으로 천 리에 다시 없는 자리이고 천 년에 한 번 만날까 말까 한 자리’라고 하였다.”
(〈정조실록〉 1789년 7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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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룡자'는 신라 말 승려이자 풍수설의 대가인 도선(道詵, 827~898)을 가리킨다. 정조는 고산 윤선도(孤山 尹善道, 1587~1671)의 문집에 전해지는 도선의 풍수 관련 이야기를 인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영우원 이전을 위해 정조가 얼마나 깊이 생각하고 연구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아마도 즉위 때부터 이장을 생각했지만, 때와 명분을 기다렸던 것으로 보인다.
영우원의 지세가 좁고 답답한 데다 흉지라는 이야기가 나돌기도 했다. 1789년 정조는 수원 읍치가 있던 화산 아래에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을 옮기고 현륭원(顯隆園)이라고 이름 지었다.
경기도 화성시 융릉과 건릉으로 간다. 입구에 들어서고 얼마 되지 않아 두 갈래 길이 나오는데, 오른쪽이 사도세자와 그의 비 혜경궁 홍씨(惠慶宮 洪氏·헌경왕후 獻敬王后, 1735~1815)가 잠든 융릉이다.
융릉은 수은묘, 영우원, 현륭원을 거쳐 현재는 융릉이 됐다. 그래서 융릉은 묘(墓), 원(園), 능(陵)이라는 세 가지 명칭을 모두 거친 특별한 능이다.
금천교를 지나면 왼편에 동그란 연못이 보인다. 정조가 현륭원을 조성한 이듬해인 1790년 마련한 원형(圓形)의 독특한 곤신지(坤申池)다.
당시 연지는 각진 네모 형태가 일반적이었는데, 융릉의 연못은 둥글게 조성됐다. 여의주를 형상화한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정조가 아버지의 무덤에 풍수적 의미를 담아 조성한 시설이다.
융릉을 바라본다. 능침과 정자각을 이루는 축이 특이하다. 조선왕릉은 능침과 정자각이 축을 이루어 일직선이지만, 융릉은 능침으로부터 정자각이 정면에서 비켜 있다.
정자각의 위치와 관련해 정조는 혈성이 낮고 평평하므로 정자각을 가운데에 놓으면 안산(案山)을 바라보는 시야가 막히지 않더라도 명당의 기운이 통창하지 못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따라서 형세에 맞춰 좌우로 옮겨야 한다고 했다.
비좁고 막힌 뒤주에서 죽은 아버지를 위해 일부러 앞을 훤히 트이게 한 것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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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자각의 위치가 여느 능과 다르게 정해지면서 능지기의 처소인 수복방의 위치도 바뀌었다. 제례 음식을 준비하는 수라간과 수복방이 나란히 배치된 모습은 융릉의 특징 가운데 하나다.
보통의 능은 능을 바라봤을 때 왼편에는 수라간, 오른편에는 수복방이 위치하지만 융릉은 왼편에 수라간, 수복방이 나란히 있다.
융릉에서 또 하나 눈여겨볼 것은 병풍석과 무석인이다. 일반적으로 조선 후기 왕릉의 능침에는 난간석을 두르지만, 융릉은 난간석 대신 병풍석을 둘렀다. 연꽃과 모란 모양을 넣은 화려한 병풍석이다.
칼을 차고 있는 무석인은 군대 지휘권을 상징하는 석물이어서 원은 물론 추존 왕의 능에는 배치되지 않는다. 그러나 정조는 아버지의 무덤이 아직 왕릉으로 격상되기 전인데도 문석인과 무석인을 세우고 왕릉에 준하는 격식으로 조성했다.
병풍석과 무석인은 아버지에 대한 정조의 마음이었을 것이다.
1815년(순조 15년) 혜경궁 홍씨가 81세로 세상을 떠나자 이듬해인 1816년 현륭원에 합장됐다.
정조는 생전에 자신의 묫자리를 융릉 발 아래인 동쪽 언덕으로 정했다. 실제로 1800년 승하한 뒤 그곳에 안장됐다. 그러나 1821년 정조의 비 효의왕후(孝懿王后, 1753~1821)가 세상을 떠나자 지대가 너무 낮아 풍수에 좋지 않다는 등의 이유로 지금의 언덕 자리로 옮겨 합장했다.
처음 정한 자리보다는 떨어져 있지만 아버지의 융릉까지는 걸어서 10분 정도로 가까운 곳이다. 융릉에서 정조의 초장지까지는 산책길이 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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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륭원이 융릉이라는 능으로 승격한 것은 정조가 승하한 지 99년 후인 고종 때였다. 고종(高宗, 1852~1919)은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에 오른 뒤인 광무 3년(1899년), 사도세자를 장종(莊宗)으로 추존했다. 이어 장조의황제(莊祖懿皇帝)로 다시 추존하고, 현륭원도 융릉으로 격상했다.
그래서 융릉에는 두 개의 비석이 세워져 있다. 첫 번째 비석은 정조가 직접 글을 짓고 쓴 것으로, '사도 장헌세자 현륭원'이라고 적혀 있다. 다른 하나는 고종 때 세운 비석으로, 장조의황제 융릉임을 밝히고 있다.
사도세자는 끝내 왕위에 오르지 못했지만, 정조 이후 조선의 왕위는 사도세자의 세 아들로 이어지는 계보에서 계승됐다. 정조의 이복동생인 은언군(恩彦君, 1754~1801)의 친혈통 후손이 철종(哲宗, 1831~1863)이다. 또 다른 이복동생 은신군(恩信君, 1755~1771)을 잇는 양자 계보를 통해 고종과 순종(純宗, 1874~1926)도 사도세자의 후손으로 연결된다.
사도세자는 뒤주에서 비참하게 생을 마감했지만, 아들 정조는 평생 아버지의 명예를 회복하고 왕릉에 버금가는 무덤을 만들어 드리려 했다.
현륭원(융릉)은 정조가 효심과 이상 정치를 실현하기 위해 시작한 모든 계획의 중심이었다. 현륭원을 조성하고 수원화성을 쌓고 원찰인 용주사를 세운 것도 결국 아버지를 향한 효심에서 출발했다.
융릉에는 왕이 되지 못한 아버지를 왕으로 모시고 싶었던 아들의 간절한 마음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글 : 조수진 전 국회의원
- 제21대 국회의원(전 양천갑 당협위원장)
- 국민의힘 수석최고위원, 최고위원
- 제21대 국회 법제사법, 국회운영위원
- 동아일보 정치부 기자, 논설위원
- 채널A '직언직설' 앵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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