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정치 보복과 권력 다툼, 두 번이나 중종과 헤어진 장경왕후의 희릉(禧陵)

기획·특집 | 조수진  기자 |입력

스물다섯에 세상을 떠난 장경왕후, 산후병으로 맞은 짧은 생애 희릉 천장에 얽힌 김안로의 정치적 의도와 조정의 권력 다툼 중종의 능 이전으로 다시 홀로 남은 장경왕후의 마지막 안식처

[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정치 보복과 권력 다툼, 두 번이나 중종과 헤어진 장경왕후의 희릉
[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정치 보복과 권력 다툼, 두 번이나 중종과 헤어진 장경왕후의 희릉

경기도 고양시 서삼릉 입구로 들어서 오른쪽으로 난 산책로를 따라 가면 희릉(禧陵)이다. 희릉은 중종(中宗)의 두 번째 왕비이자 첫 번째 계비였던 장경왕후(章敬王后) 윤씨의 단릉이다.

중종에게는 단경왕후, 장경왕후, 문정왕후 등 세 명의 정비(正妃)가 있었다. 단경왕후 신씨(1487~1557)는 1506년 중종반정으로 남편 진성대군이 왕위에 오른 지 7일 만에 폐위됐다. 연산군의 매부이기도 했던 그녀의 아버지 신수근(愼守勤)이 반정에 가담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반정 세력에게 죽임을 당했고, 딸인 그녀 역시 왕비 자리에서 쫓겨나야 했다.

단경왕후의 뒤를 이어 첫 번째 계비가 된 장경왕후(1491~1515)는 반정 공신인 파원부원군 윤여필(尹汝弼)의 딸이자, 반정 주도 세력의 핵심 인물이었던 윤임(尹任)의 누이였다. 단경왕후가 폐출된 후 숙의에 봉해졌다가 이듬해 왕비로 책봉됐다. 딸 효혜공주와 아들 인종(仁宗)을 차례로 낳았지만, 1515년(중종 10년) 인종을 낳고 산후병으로 7일 만에 세상을 떠났다. 스물다섯의 젊은 나이였다.

장경왕후에게는 아들 인종의 이름에 얽힌 이야기가 전해진다. 임신 중 꿈에 한 사람이 나타나 아이의 이름을 ‘억명(億命)’이라 하라고 했다는 것이다. 장경왕후는 출산 후 위독해지자 중종에게 아들의 이름을 억명으로 지어달라고 부탁했다.

억명은 억만년의 목숨을 뜻하는 이름처럼 들린다. 아들이 오래도록 건강하게 살기를 바라는 어머니의 간절한 소망이 담긴 이름이었을까.

아명 억명은 훗날 이호(李峼)로 바뀌었다. 인종은 1544년 왕위에 올랐지만, 이듬해인 1545년 3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재위 기간은 불과 8개월이었다.아들의 장수를 바랐던 어머니는 아들이 태어난 지 며칠 만에 먼저 세상을 떠났고, 아들은 왕위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아 생을 마감했다.

[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정치 보복과 권력 다툼, 두 번이나 중종과 헤어진 장경왕후의 희릉
[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정치 보복과 권력 다툼, 두 번이나 중종과 헤어진 장경왕후의 희릉

희릉은 처음에는 경기도 광주(현재 서울 서초구 내곡동)의 헌릉(獻陵) 서쪽 언덕에 조성됐다. 헌릉은 태종과 원경왕후 민씨의 능이다. 그러나 1537년(중종 32년), 희릉은 지금의 고양시 원당으로 옮겨졌다. 김안로(金安老) 등이 능의 광중(壙中)에 좋지 않은 돌이 많아 흉하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이로써 희릉은 서삼릉에 처음 조성된 왕릉이 됐다.

김안로는 장경왕후의 딸 효혜공주의 시아버지였다. 그는 희릉을 옮기는 과정에서 기존 능 조성에 관여했던 인물들에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여론을 이끌었다. 김안로는 자신을 탄핵했던 정광필(鄭光弼)과 남곤(南袞)을 겨냥했다.

장경왕후의 국상 당시 정광필은 빈전·국장·산릉의 세 도감을 총괄했고, 남곤은 산릉도감 제조였다. 김안로는 이들이 불길한 땅에 능을 썼다는 이유로 책임을 물었다.

정광필은 김해로 유배됐고, 이미 사망한 남곤은 관작을 추탈당했다.

풍수상 불길하다는 명분 뒤에는 반대파를 제거하려는 정치적 의도가 숨어 있었다. 희릉 천장은 왕릉 조성마저 정쟁의 도구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희릉을 옮긴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김안로는 문정왕후의 폐위를 꾀하다가 실각했고, 유배된 뒤 사사됐다. 권력의 무상함을 보여준다.

희릉을 옮긴 지 7년 후인 1544년(중종 39년), 중종이 세상을 떠났다. 아들 인종은 아버지의 능을 어머니 희릉 서쪽 언덕에 조성하고 두 능을 합쳐 능호를 그대로 희릉이라 했다. 오늘날 철종과 철인왕후의 예릉이 있는 곳이다.

그러나 인종은 재위 8개월 만에 세상을 떠났다. 뒤를 이어 명종이 즉위하자, 중종의 세 번째 왕비이자 명종의 생모인 문정왕후(文定王后) 윤씨(1501~1565)가 중종의 능을 옮기도록 주장했다.

중종의 능이 풍수상 좋지 않다고 내세웠지만, 남편과 한곳에 묻히려는 뜻도 있었던 것으로 해석된다. 결국 1562년(명종 17년), 중종의 능은 성종과 계비 정현왕후 윤씨가 잠든 선릉(宣陵) 곁으로 옮겨졌다. 새 능은 정릉(靖陵)이라 불렸다.

문정왕후의 뜻과 달리 그녀 자신은 훗날 남편 곁에 묻히지 못하고 태릉(泰陵)에 안장됐다. 이로써 장경왕후의 능은 다시 홀로 남게 됐다. 희릉이라는 이름도 장경왕후의 능에만 남았다.

[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정치 보복과 권력 다툼, 두 번이나 중종과 헤어진 장경왕후의 희릉
[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정치 보복과 권력 다툼, 두 번이나 중종과 헤어진 장경왕후의 희릉

산후병으로 스물다섯에 세상을 떠난 장경왕후는 딸의 시아버지였던 김안로의 정치적 의도 속에서 능을 옮겨야 했다. 그 후 아들 인종의 뜻에 따라 남편 중종 곁에 나란히 잠들었지만, 이번에는 문정왕후의 결정으로 죽어서도 다시 한번 남편과 헤어져야 했다.

인종은 부모의 곁에 묻히고 싶다고 유언했다. 이에 따라 중종과 장경왕후의 능 근처에 효릉이 조성됐다. 그러나 문정왕후가 중종의 능만 현재의 서울 강남으로 옮겨지면서 인종은 아버지와는 헤어졌다. 어머니의 얼굴조차 기억하지 못했을 아들은 죽어서야 어머니 가까이 머물게 된 셈이다. 다만, 효릉은 한국마사회 원당목장과 관련 시설로 인해 오랫동안 일반인의 출입이 제한됐다.

한 사람의 생애는 스물다섯 해로 짧게 끝났다. 그녀가 잠든 능은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여러 차례 자리를 바꾸었다.

죽어서도 평온하게 머물지 못했던 장경왕후. 희릉의 고요한 숲길을 걸으면 한 여인의 짧고도 기구한 생애를 생각하게 된다.

조수진 전 국회의원
조수진 전 국회의원

글 : 조수진 전 국회의원
- 제21대 국회의원(전 양천갑 당협위원장)
- 국민의힘 수석최고위원, 최고위원
- 제21대 국회 법제사법, 국회운영위원
- 동아일보 정치부 기자, 논설위원
- 채널A '직언직설' 앵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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