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고난은 함께했으나 영광은 함께하지 못한 원경왕후(元敬王后), 태종(太宗)과 원경왕후의 헌릉(獻陵)

기획·특집 | 조수진  기자 |입력

왕자의 난을 함께 헤쳐 나간 정치적 동반자…태종 즉위 후 친정 몰락과 부부 갈등으로 이어진 비극 남동생 네 명을 잃고 후궁 문제로 남편과 대립한 원경왕후…『태종실록』에 남은 절절한 원망 두 기의 봉분과 신도비가 자리한 헌릉…권력을 함께 일군 부부의 엇갈린 운명을 담다

[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고난은 함께했으나 영광은 함께하지 못한 원경왕후, 태종과 원경왕후의 헌릉
[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고난은 함께했으나 영광은 함께하지 못한 원경왕후, 태종과 원경왕후의 헌릉

서울 강남구 개포동과 일원동 남쪽에 자리한 대모산(大母山)은 해발 293m의 아담한 산이다. 산세가 늙은 할머니처럼 평온하고 부드럽다 해서 할미산으로 불렸다.

태종(太宗)의 왕비 원경왕후(元敬王后) 민씨의 능이 산 남쪽에 조성되면서 태종은 산 이름을 대모산으로 고쳐 부르도록 했다.

태종과 원경왕후는 정치적 동반자였으나, 태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갈등 관계로 변했다. 태종은 골육상쟁으로도 불리는 '왕자의 난'을 주도하고 반대 세력을 제거했다. 원경왕후는 친정 남동생들과 함께 남편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그러나 태종이 왕위에 오른 뒤 원경왕후의 남동생들은 차례로 제거됐고 친정은 몰락했다. 태종은 왕권 강화를 위해 외척 세력을 경계했으며, 후궁도 여럿 두었다. 원경왕후와의 갈등은 갈수록 깊어졌다.

1418년(태종 18년) 태종이 왕위를 아들 세종(世宗)에게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난 지 2년 후인 1420년(세종 2년), 원경왕후는 수강궁(壽康宮 창경궁 자리)에서 56세의 나이로 승하했다. 태종은 원경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경기도 광주(현재의 서울 강남구 내곡동)에 능을 조성했다. 2년 후인 1422년 태종도 세상을 떠나자 왕비 곁에 묻혔다.

권력을 얻는 데 뜻을 함께했으나, 뜻을 이룬 뒤에는 불화가 극심했던 두 사람이다. 원경왕후가 남편과 나란히 묻히기를 원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그러나 태종은 왕비 곁에 묻혔고, 두 사람의 무덤은 하나의 능역 안에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고난은 함께했으나 영광은 함께하지 못한 원경왕후, 태종과 원경왕후의 헌릉
[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고난은 함께했으나 영광은 함께하지 못한 원경왕후, 태종과 원경왕후의 헌릉

원경왕후는 고려 말 대표적인 명문가였던 여흥 민씨(驪興閔氏) 민제(閔霽)의 딸이었다. 아버지 민제는 학문과 덕망으로 이름을 얻었으며, 성균관에서 사성(司成)을 지내며 후학을 양성했다.

1382년(우왕 8년), 18세의 민씨는 16세의 이방원(李芳遠)과 혼인했다. 당시 이방원은 훗날 조선을 건국하는 이성계(李成桂)의 아들이었지만, 민씨 집안은 고려의 유력한 명문가였다.

이방원은 혼인한 이듬해인 1383년(우왕 9년) 문과에 급제했다. 조선의 역대 국왕 가운데 과거 문과에 급제한 임금은 태종이 유일하다. 1388년에는 이색(李穡)의 명나라 사행에 서장관(書狀官)으로 참여해 남경(南京·오늘날 중국 난징)에 다녀왔다.

이방원은 젊은 시절 상당 기간 처가에서 생활했다. 민씨는 집안의 살림을 책임지는 한편 남편의 정치적 성장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1392년 조선 건국 후 정도전(鄭道傳)의 정치적 주도권 아래 이방원은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했다. 정도전은 왕자들이 거느린 사병을 혁파하고 무기를 거둬들이려 했으며, 이는 이방원에게 큰 위협이었다.

이때 민씨는 몰래 병장기를 준비해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다. 이러한 준비는 훗날 1398년(태조 7) 제1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이 권력을 장악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실록과 관련 기록에는 원경왕후가 병장기와 갑옷을 내어주고 남편의 거사를 도왔다는 내용이 전한다. 남편을 불러내 정도전 일파를 공격하도록 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1400년(정종 2년) 제2차 왕자의 난 때도 원경왕후는 이방원에게 갑옷을 내주며 적극적으로 독려했다고 한다. 원경왕후는 양녕대군(讓寧大君)·효령대군(孝寧大君)·충녕대군(忠寧大君)·성녕대군(誠寧大君) 등 4명의 아들과 정순공주(貞順公主)를 비롯한 4명의 딸을 두었다.

그러나 정작 남편이 왕이 된 후 원경왕후의 정치적 영향력은 크게 줄어들었다. 태종은 왕권 강화를 위해 외척의 발호를 차단하려 했고, 이 과정에서 원경왕후의 남동생 네 명이 모두 화를 당했다.

민무구(閔無咎)와 민무질(閔無疾)은 왕자의 난에서 공을 세워 권세를 누렸으나, 태종의 왕권 강화 과정에서 탄핵을 받았다. 제주 등지로 유배된 뒤 1410년(태종 10년) 태종의 명으로 자진했다.

1415년(태종 15년)에는 민무휼(閔無恤)과 민무회(閔無悔)이 불충 등의 죄목으로 탄핵됐다. 원경왕후가 병석에 있을 때 문안차 입궁했다가 양녕대군과 민씨 가문의 처지를 놓고 벌인 말이 문제가 됐다. 결국 두 사람도 1416년(태종 16년) 유배지에서 자진했다.

원경왕후는 남편을 왕으로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했지만, 왕비가 된 뒤에는 친정 남동생 네 명을 모두 잃는 비극을 겪었다.

태종은 후궁을 여럿 두었고, 이에 원경왕후는 노골적인 불만을 드러냈다. 『태종실록』에는 원경왕후가 남편에게 다음과 같이 항의한 내용이 기록돼 있다.

“어찌하여 예전의 뜻을 잊으셨습니까? 제가 함께 어려움을 지키고 같이 화란(禍亂)을 겪어 국가를 차지하였사온데, 이제 나를 잊음이 어찌 여기에 이르셨습니까?”

함께 고난을 겪으며 왕위에 올랐지만, 왕이 된 뒤 자신을 외면하는 남편을 향한 원경왕후의 원망이 절절하게 느껴지는 대목이다.

태종과 원경왕후가 나란히 잠들어 있는 헌릉(獻陵)은 능침 가까이까지 올라가 볼 수 있다. 정자각을 바라봤을 때 왼쪽으로 능침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길이 있다. 두 사람의 봉분은 상당히 크고 웅장하다.

[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고난은 함께했으나 영광은 함께하지 못한 원경왕후, 태종과 원경왕후의 헌릉
[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고난은 함께했으나 영광은 함께하지 못한 원경왕후, 태종과 원경왕후의 헌릉

태조(太祖)의 건원릉(健元陵)이 조선 왕조를 개창한 군주의 첫 무덤이라면, 헌릉은 왕권을 강화하고 조선의 통치 체제를 정비한 태종의 무덤이다. 능 앞에 배치된 석물의 규모와 숫자도 눈길을 끈다.

문석인과 무석인이 각각 두 쌍씩 배치되어 있으며, 그 뒤에는 말 모양의 석마도 놓여 있다. 문석인과 무석인이 각각 한 쌍씩 배치돼 있는 다른 능과 규모가 다르다. 두 봉분에는 병풍석과 난간석이 둘러져 있다. 쌍릉의 두 능침을 하나의 능역으로 연결한 구조가 특징이다.

원경왕후가 남편과 따로 묻히기를 원했다는 이야기를 떠올리면, 나란히 자리한 두 봉분과 하나로 이어진 능역은 더욱 묘하게 다가온다.

정자각 옆에는 제향 후 축문을 태우는 소전대(燒錢臺)가 있다. 소전대는 조선 전기 왕릉에서 볼 수 있는 석물로, 태조의 건원릉과 태조의 왕비인 신덕왕후 강씨(神德王后 康氏)의 정릉(貞陵) 등에 남아 있다.

비각 안에는 두 기의 신도비가 있다. 바라봤을 때 왼쪽은 세종 때 세워진 것이다. 변계량(卞季良)이 글을 짓고 윤회(尹淮)가 글씨를 썼으며, 보물로 지정돼 있다.

[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고난은 함께했으나 영광은 함께하지 못한 원경왕후, 태종과 원경왕후의 헌릉
[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고난은 함께했으나 영광은 함께하지 못한 원경왕후, 태종과 원경왕후의 헌릉

세월이 흐르면서 원래의 신도비가 마모되고 비석 받침돌이 임진왜란 때 손상되자 숙종 때 새 신도비를 세웠다. 비각 안에서 두 기의 신도비를 함께 볼 수 있는 이유다.

태종은 생전에 자신의 능 자리를 미리 정해두었다. 능을 조성하는 과정에서 한강을 건너야 하는 문제가 있었고, 당시 부교(浮橋)를 이용하는 방안이 논의됐다고 전해진다.

조선 초 토목과 건축에 뛰어난 능력을 보였던 박자청(朴子靑)은 종묘와 경회루, 창덕궁 등 여러 궁궐과 건축물의 조성에 참여한 인물이다. 헌릉 조성에도 그의 이름이 관련 기록에 등장한다.

현재 헌릉 주변은 과거의 능역을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주변 환경이 변했다. 비닐하우스와 개발된 시설들이 줄줄이 들어서 있고, 능역의 경계를 표시하던 금천(禁川)의 흔적은 찾을 길이 없어 아쉽다.

왕자의 난을 함께 헤쳐 나가며 조선의 왕권을 세운 부부. 그러나 왕위에 오른 뒤에는 남편의 권력 강화와 외척 제거, 후궁 문제로 극심한 갈등을 겪었다.

원경왕후 민씨는 남편을 왕으로 만드는 데 누구보다 큰 역할을 했지만, 정작 왕비가 된 뒤에는 남편에게서 소외되고 친정까지 몰락하는 아픔을 겪었다.

헌릉의 거대한 두 봉분을 바라보며 권력을 향해 함께 달려갔던 두 사람의 삶과, 권력을 얻은 뒤 서로에게 등을 돌렸던 부부의 역설적인 운명을 생각해 본다.

조수진 전 국회의원
조수진 전 국회의원

글 : 조수진 전 국회의원
- 제21대 국회의원(전 양천갑 당협위원장)
- 국민의힘 수석최고위원, 최고위원
- 제21대 국회 법제사법, 국회운영위원
- 동아일보 정치부 기자, 논설위원
- 채널A '직언직설' 앵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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