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검은 말의 고장, 남한강 물길 따라 여주 거쳐 충주

기획·특집 | 조수진  기자 |입력

황마와 여마의 전설에서 비롯된 여주 지명의 유래 영월루·마암·신륵사에 남은 남한강의 역사 세종대왕릉 영릉을 거쳐 충주로 이어지는 옛길 답사

[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검은 말의 고장, 남한강 물길 따라 여주 거쳐 충주
[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검은 말의 고장, 남한강 물길 따라 여주 거쳐 충주

천지는 끝없고 인생은 유한하니(天地無涯生有涯)
호연히 돌아갈 마음 어디로 갈 것인가(浩然歸志欲何之)
여강 굽이굽이 산은 그림처럼 아름다워(廬江一曲山如畵)
절반은 단청 같고 절반은 시와 같구나(半似丹靑半似詩)

경기도 여주의 아름다움을 이만큼 잘 나타낸 시가 또 있을까. 고려 말의 대학자이자 정치가였던 목은 이색은 여강의 풍광을 이렇게 노래했다.

‘여강’은 남한강 물길 가운데 여주를 휘감아 도는 40㎞ 구간을 따로 부르는 이름이다. 여주(驪州)의 ‘려(驪)’는 검은 말을 뜻하는데, 여주의 옛 지명인 황려(黃驪) 역시 누런 말인 황마(黃馬)와 검은 말인 여마(驪馬)의 전설에서 비롯됐다고 전해진다.

여주는 조선시대 충청도와 강원도는 물론 영남 지방에서 거둬들인 세곡을 실어 나르고, 한양으로 향하는 길손들이 지나가던 교통의 요지였다. 철도와 고속도로가 등장하면서 옛 영화는 사라졌지만, 강변의 풍경과 정취는 여전히 남아 있다.

조선시대 한양에서 여주를 지나 충주로 이어지는 길은 남한강 물길과도 맞닿아 있었다. 이 점에 착안해 충주 답사 길에 여주를 들러 가기로 했다. 새벽 5시에 출발, 도로가 막히기 전 여주에 도착해 몇 곳을 둘러보고, 오전 10시 이후 도슨트 해설을 들을 수 있는 충주의 명소들을 찾아가는 일정이었다.

[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검은 말의 고장, 남한강 물길 따라 여주 거쳐 충주
[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검은 말의 고장, 남한강 물길 따라 여주 거쳐 충주

강변의 바위 절벽 위에 올라앉은 영월루에서 새벽을 맞았다. ‘달을 맞는 누각’이라는 뜻의 영월루(迎月樓)는 여주목 관아의 정문으로 쓰였던 누각으로, 1924년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다. 누각에 올라서니 동쪽으로 충주에서 서쪽의 양평으로 이어지는 유장한 남한강 물줄기가 한눈에 들어온다.

영월루 근처의 이정표를 따라 강가로 걸어 내려가면 거대한 바위에 ‘마암(馬巖)’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이곳에는 황마와 여마가 솟아났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두 마리 말의 이름에서 한 글자씩 따와 황려라는 지명이 생겼다는 것이다. 황려는 이후 여흥을 거쳐 여주라는 이름으로 이어졌다.

깎아지른 듯한 절벽에 자리한 기이한 바위가 바로 마암이다. 바위 근처의 암혈에서는 여흥 민씨의 시조가 태어났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이래저래 여주의 지명은 마암과 그곳에서 나타났다는 두 마리 말의 전설로 귀착된다.

여흥 민씨(驪興閔氏)는 고려의 문신 민칭도(閔稱道)를 시조로 하는데, 북송에서 고려로 건너와 정착했다는 전승이 전해진다. 고려 말 문신 민제는 무인 집안 출신인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 이방원에게 딸을 시집보냈다. 그 딸이 훗날 조선의 제3대 왕 태종의 왕비가 된 원경왕후 민씨다.

영월루 아래에는 보물로 지정된 창리 삼층석탑과 하리 삼층석탑이 있다. 두 석탑 모두 옛 절터에서 옮겨온 것이다. 창리 삼층석탑은 고려 중기 이후, 하리 삼층석탑은 고려 중기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검은 말의 고장, 남한강 물길 따라 여주 거쳐 충주
[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검은 말의 고장, 남한강 물길 따라 여주 거쳐 충주

마암을 둘러본 뒤 강 건너편의 신륵사(神勒寺)로 향한다. 신륵사는 신라 진평왕 때 원효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지지만, 이를 뒷받침할 확실한 근거는 없다. 절 이름에 쓰인 ‘륵(勒)’은 굴레나 재갈을 뜻하는 글자다.

신륵사에는 고려 고종 때 인당대사가 사나운 용마의 고삐를 잡아 제압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남한강의 거센 물결을 용마에 빗댄 것일까. 강가에 자리한 절의 이름에도 말, 이곳의 물길과 얽힌 이야기가 담겨 있다.

신륵사는 평지에 가까운 강변에 자리한 점이 독특하다. 산속 깊이 들어앉은 사찰과는 달리 남한강의 풍광을 바로 곁에서 바라볼 수 있다. 고려 말의 고승 나옹화상은 1376년 이곳에서 입적했다. 나옹화상의 시는 널리 알려져 있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 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 하고..”

[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검은 말의 고장, 남한강 물길 따라 여주 거쳐 충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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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 안으로 들어서면 남한강변 넓은 암반 위 삼층석탑과 다층전탑으로 발걸음이 자연스럽게 옮겨진다. 벽돌을 구워 쌓은 다층전탑은 강을 오가는 배와 나루터 사람들에게 이정표 구실을 했다고 한다. 다층전탑은 고려시대의 전탑 양식을 보여주는 귀중한 유적이다.

전탑 근처에는 수령 600년 이상으로 알려진 보호수들도 서 있다. 은행나무와 참나무가 오랜 세월의 흔적을 간직한 채 나란히 자라고 있다. 은행나무는 오래전 나옹화상이 심었다고 전해진다. 그래서인지 나무에는 갖가지 소망을 적은 쪽지가 많이 매달려 있다.

신륵사는 조선시대 세종대왕의 능인 영릉(英陵)이 여주로 옮겨온 뒤 능침사찰, 즉 원찰이 됐다. 성종 3년인 1472년의 일이다. 이때 보은사(報恩寺)라는 이름으로 불렸으며, 이후 원찰로서의 의미가 약해지면서 다시 신륵사라는 본래 이름으로 돌아왔다.

오전 9시, 문을 여는 시간에 맞춰 세종대왕릉인 영릉으로 향한다. 영릉은 세종대왕과 소헌왕후를 합장한 능이다. 세종대왕은 헌릉 서쪽에 묻혔다가, 예종 원년인 1469년 현재의 여주로 옮겨왔다. 아쉽지만 영릉을 끝으로 충주로 간다. 영릉에서 충주 탄금대까지는 40분 남짓이다.

검은 말의 전설이 남은 땅에서 남한강의 유장한 물길을 바라보고 나니, 한양에서 충주로 이어졌던 옛길의 풍경을 조금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많이 보고, 많이 느끼면 마음이 충만해지고 의욕이 솟는다.

조수진 전 국회의원
조수진 전 국회의원

글 : 조수진 전 국회의원
- 제21대 국회의원(전 양천갑 당협위원장)
- 국민의힘 수석최고위원, 최고위원
- 제21대 국회 법제사법, 국회운영위원
- 동아일보 정치부 기자, 논설위원
- 채널A '직언직설' 앵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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