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도봉구 방학동에서 만나는 폐위된 왕 연산군과 세종의 딸 정의공주

기획·특집 | 조수진  기자 |입력

왕위에서 쫓겨나 묘로 남은 연산군과 세종의 딸 정의공주가 잠든 도봉구 방학동 600년 은행나무와 원당샘, 재실에 남은 연산군 가족의 흔적 불과 120m 거리에 자리한 두 묘역…조선 왕실의 엇갈린 삶과 역사

[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도봉구 방학동에서 만나는 폐위된 왕 연산군과 세종의 딸 정의공주
[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도봉구 방학동에서 만나는 폐위된 왕 연산군과 세종의 딸 정의공주

연산군(燕山君, 1476~1506)의 삶은 영화와 드라마의 단골 소재다. 재위 12년 동안 무오사화(戊午士禍)와 갑자사화(甲子士禍)를 일으키며 수많은 선비를 죽이고 신하들을 공포에 떨게 한 폭군으로 기록돼 있다.

연산군의 폭정을 이해하려면 어머니 폐비 윤씨(廢妃 尹氏, ?~1482)의 비극을 빼놓을 수 없다. 연산군은 왕위에 오른 후에야 어머니의 폐위와 사사에 얽힌 진실을 알게 되면서 큰 충격을 받았다.

특히 1504년 갑자사화 때는 어머니의 죽음에 관련된 인물들을 색출해 처벌하고, 한명회(韓明澮, 1415~1487) 등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들의 무덤까지 파헤치는 부관참시(剖棺斬屍)를 자행하는 등 복수에 나섰다.

어머니의 비극을 알게 된 아들의 분노와 슬픔은 이해할 여지가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무고한 사람들까지 죽이고 국정을 파탄으로 몰아간 폭정이 정당화될 수는 없다. 결국 연산군은 1506년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왕위에서 쫓겨났다.

강화도 교동(喬桐)으로 유배돼 위리안치(圍籬安置)됐다가 두 달 뒤 역질로 생을 마감했다. 그의 나이 31세였다.

[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도봉구 방학동에서 만나는 폐위된 왕 연산군과 세종의 딸 정의공주
[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도봉구 방학동에서 만나는 폐위된 왕 연산군과 세종의 딸 정의공주

서울의 동북쪽 도봉구 방학동으로 간다. 방학동(放鶴洞)은 지명에 학(鶴)자가 들어간다. 학과 관련된 지형에서 비롯됐다는 설이 있다.

지하철 1호선 창동역에서 내려 1144번이나 1161번 버스를 타고 10여 분 가면 '정의공주묘·연산군묘' 정류장이 있다. 정류장에서 왼쪽 골목으로 들어가면 연산군묘(방학동 산77)가 나온다. 우이신설선을 이용하는 방법도 있다. 조선시대 이곳은 경기도 양주(楊州)였다.

묘역에 들어서면 조선의 왕릉과는 다른 소박한 규모가 한눈에 들어온다. 왕이었지만 폐위된 군(君)의 신분으로 생을 마쳤기에 능(陵)이 아닌 묘(墓)로 남았다.

연산군 묘역에는 연산군과 부인 신씨, 딸 휘순공주 내외의 묘, 그리고 태종의 후궁 의정궁주 조씨의 묘가 함께 자리하고 있다.

연산군 옆에는 부인 폐비 신씨(廢妃 愼氏, 1476~1537)가 묻혀 있다. 폐위된 뒤에는 거창군부인(居昌郡夫人)으로 불렸다. 그 앞에는 태종(太宗)의 마지막 후궁인 의정궁주 조씨(誼靖宮主 趙氏)의 묘가 자리하고 있다. 가장 앞쪽에는 중종반정 이후 연산군의 유일한 직계 자손인 휘순공주(徽順公主)와 남편 구문경(具文璟)의 묘가 있다.

연산군은 1513년 부인 신씨의 요청으로 강화 교동도에서 이곳으로 옮겨왔다. 이곳은 신씨의 외할아버지 임영대군(臨瀛大君, 1420~1469)의 땅이었다. 임영대군은 세종의 넷째 아들이다.

임영대군은 후사가 없이 세상을 떠난 할아버지의 마지막 후궁 의정궁주 조씨의 묘를 이곳에 조성했다. 죽어서 갈 곳이 없었던 연산군이 이미 조성된 태종 후궁의 묘 뒤편에 자리를 잡은 셈이다.

중종반정 이후 연산군의 딸 휘순공주는 시아버지 구수영(具壽永, 1456~1523)에 의해 남편 구문경과 강제로 이혼당했다. 우여곡절 끝에 휘순공주는 남편과 재회했지만, 두 사람은 오래 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연산군의 부인 폐비 신씨가 마지막으로 남편 곁에 묻혔다.

[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도봉구 방학동에서 만나는 폐위된 왕 연산군과 세종의 딸 정의공주
[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도봉구 방학동에서 만나는 폐위된 왕 연산군과 세종의 딸 정의공주

연산군 묘 앞에는 문석인(文石人)만 지키고 있을 뿐 무석인(武石人)은 보이지 않는다. 석마(石馬), 석양(石羊), 석호(石虎)도 없다. 장명등(長明燈)은 팔각이 아닌 사각이다.

연산군 무덤 앞 표석에는 '연산군지묘(燕山君之墓)'라고 쓰여 있다. 한때 왕이었으나 폐위되었기에 대군의 예에 맞춰 무덤이 조성된 것이다.

묘역 입구 바로 앞에는 거대한 은행나무가 자리하고 있다. 나무에는 폐비 신씨의 애처로운 이야기가 전해진다.

신씨는 연산군의 묘를 은행나무가 내려다보이는 방학동 언덕으로 옮겨 달라고 중종에게 간청했고, 1513년 남편의 묘를 이곳으로 이장했다. 모두가 연산군을 비난했지만, 신씨에게 연산군은 하나뿐인 지아비였다.

수령 600년의 은행나무는 연산군의 이장 과정과 휘순공주 내외, 마지막으로 신씨가 연산군 옆자리에 묻히기까지의 세월을 지켜보았을 것이다.

이 은행나무는 조선 후기 경복궁 증축 때 징목(徵木) 대상에 선정돼 베어내야 했지만, 마을 사람들이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1820~1898)에게 간청해 살아남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대감나무'라는 별명은 대원위대감(大院位大監)으로 불린 흥선대원군의 이름을 딴 것이라고 한다.

은행나무에서 연산군 묘를 바라보고 왼쪽으로 30걸음 정도 옮기면 원당샘이 나온다. 마을 한가운데 위치한 우물로, 파평 윤씨(坡平尹氏) 집성촌이었던 이 마을 사람들에게 600여 년 전부터 생활용수를 공급해 왔다.

수량도 풍부해 심한 가뭄에도 마른 적이 없고, 일정한 수온을 유지해 혹한에도 얼어붙은 일이 없다고 한다.

원당샘 앞에는 연산군묘 재실(齋室)이 있다. 연산군의 종외증손녀의 양자인 이안눌(李安訥, 1571~1637)이 지어 1903년까지 연산군의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재실 벽에는 영조(英祖, 1694~1776)의 전교가 적혔다는 '치제(致祭) 현판'이 걸려 있다. 진품은 국립고궁박물관에 보관 중이다. 재실에는 이에 대한 한글 안내판이 있다.

현판에는 연산군의 제사를 외손이 지내게 하고, 군사 10명을 배치해 묘역을 살피는 데 소홀함이 없도록 하라는 내용이 담겨 있다는 것이다. 연산군이 세상을 떠난 지 약 270년이 지난 뒤의 일이다.

재실에서 100여 m 올라가면 김수영문학관이 자리하고 있다. 김수영(金洙暎, 1921~1968)은 한국 현대시를 대표하는 시인이다. 김수영문학관이 이곳 도봉구 방학동에 자리한 것은 김수영의 본가와 묘, 시비가 도봉구에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도봉구 방학동에서 만나는 폐위된 왕 연산군과 세종의 딸 정의공주
[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도봉구 방학동에서 만나는 폐위된 왕 연산군과 세종의 딸 정의공주

연산군 묘에서 큰길로 나와 길을 건넌다. 세종대왕의 딸 정의공주(貞懿公主, 1415~1477)와 부마 안맹담(安孟聃, 1415~1462)의 묘역이 있다. 왕이었던 연산군의 묘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크고 웅장하다. 연산군묘와는 불과 120m 거리다.

정의공주는 훈민정음(訓民正音) 창제와 관련해 흥미로운 이야기를 남기고 있다. 남편 안맹담의 『죽산안씨대동보(竹山安氏大同譜)』에는 세종(世宗, 1397~1450)이 훈민정음을 만들 때 변음(變音)과 토착(吐着)의 원리를 해결하지 못해 여러 왕자와 공주에게 시험하게 했으며, 정의공주가 이를 풀어냈다는 내용이 전한다.

세종의 딸 정의공주가 훈민정음 창제와 관련한 일화의 주인공으로 전해진다는 점은 흥미롭다.

조선시대 2품 이상의 관직을 역임하고 뛰어난 업적을 남긴 사람의 생애를 기록해 세운 비석이 신도비(神道碑)다. 이곳 신도비의 비문은 사돈인 하동부원군 정인지(鄭麟趾, 1396~1478)가 지었고, 글씨는 부부의 넷째 아들인 안빈세(安賓世, 1445~1478)가 썼다고 알려져 있다.

정의공주 묘역 뒤편에는 형제간의 우애가 매우 돈독해 임금이 화목을 뜻하는 목(睦)자를 성으로 내렸다고 알려진 사천 목씨(泗川睦氏) 묘역과 재실도 자리 잡고 있다.

한때 왕으로 군림했으나 폭정으로 폐위돼 쓸쓸하게 잠든 연산군. 조선 최고의 성군 세종의 딸로 태어나 훈민정음 창제와 관련한 일화까지 전하는 정의공주.

반경 200m도 안 되는 짧은 답사길에서 조선 왕실의 서로 다른 삶과 역사를 함께 만날 수 있다. 사람들은 연산군묘 앞에서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교훈을 얻을까.

조수진 전 국회의원
조수진 전 국회의원

글 : 조수진 전 국회의원
- 제21대 국회의원(전 양천갑 당협위원장)
- 국민의힘 수석최고위원, 최고위원
- 제21대 국회 법제사법, 국회운영위원
- 동아일보 정치부 기자, 논설위원
- 채널A '직언직설' 앵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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