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양녕은 진실로 왕위를 양보한 것일까-지덕사(至德祠)에서

기획·특집 | 조수진  기자 |입력

세자 자리에서 물러난 양녕대군, 왕위 양보라는 미담 뒤에 남은 의문 지덕사에 담긴 태백의 고사와 왕위를 양보한 형제의 역사 계유정난과 단종 복위운동에 목소리를 낸 양녕대군의 또 다른 모습

[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양녕은 진실로 왕위를 양보한 것일까-지덕사에서
[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양녕은 진실로 왕위를 양보한 것일까-지덕사에서

양녕대군(讓寧大君, 1394~1462)은 태종(太宗)의 적장자였다. 이름은 이제(李禔)다. 이방원(李芳遠)과 원경왕후(元敬王后) 민씨의 맏아들로 태어나 왕위를 이을 세자로 책봉됐다.

양녕은 11세에 왕세자가 됐다. 태종은 양녕을 정성 들여 훈육했다. 피의 역사는 자신의 세대에서 끝내고, 나라가 누구의 손에도 흔들리지 않도록 정통성 있는 후계자를 반듯하게 키워내겠다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내가 세자에게 엄격하게 하는 것은 국가의 오랜 번영을 위한 계획[萬世]에 의한 것이다…세자에게 마치 새끼를 키우는 호랑이와 같이 엄하게 하고자 하였다.”(〈태종실록〉 태종 18년 5월)

1407년 7월, 양녕은 김한로(金漢老)의 딸과 혼례를 치렀다. 김한로는 태종과 고려 말 문과(文科)에 함께 합격했으며, 당시 장원(壯元)을 차지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양녕은 음주와 매사냥을 즐겼다. 몰래 대궐 담장을 넘어 말을 달리고 활을 쏘며 술을 마셨다. 심지어 동궁 안으로 기생을 끌고 들어오기도 했다. 태종 13년(1413) 3월, 양녕은 평양 기생 소앵(小鸎)을 궁궐로 불러들였다가 적발돼 태종의 노여움을 샀다.

셋째 동생 충녕대군(忠寧大君)으로부터도 지적을 당한다. 1416년 3월, 상왕 정종(定宗)이 베푼 술자리가 끝난 뒤 양녕은 기생 칠점생을 데리고 돌아오려 했다. 칠점생은 매형 이백강(李伯剛)의 첩이었다. 이를 본 충녕은 “식구들끼리 이게 무슨 짓이냐”면서 두 번, 세 번 만류했다. 이에 양녕은 앙심을 품었다고 〈태종실록〉은 전한다.

전 중추원부사 곽선(郭璇)의 첩인 어리(於里)를 데려와 궁궐에 머물게 한 사건은 세자 교체의 결정타가 됐다. 태종이 호통을 치자 양녕은 부왕에게 친서를 올린다(1418년 5월 30일).

“부왕께서는 많은 후궁을 두면서 왜 신(臣)의 여러 첩은 다 내보내어 울부짖음이 사방에 이르고 원망이 나라 안에 가득 찹니까?”(〈태종실록〉)

태종은 격분했고, 신료들도 들고 일어났다. 황희(黃喜)는 세자 교체를 반대했다가 귀양을 떠나기도 했다. 양녕대군은 14년 가까이 지켜 온 세자의 자리에서 내려왔다. 셋째 동생 충녕대군이 세자로 교체됐고, 훗날 세종(世宗)이 됐다.

[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양녕은 진실로 왕위를 양보한 것일까-지덕사에서
[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양녕은 진실로 왕위를 양보한 것일까-지덕사에서

양녕은 세종과 문종, 단종, 세조를 거치며 살다가 1462년 69세에 세상을 떠났다. 후손들은 오늘날의 서울 동작구 상도동에 양녕대군을 모신 사당과 묘역을 두었다.

양녕대군의 사당이자 묘역인 지덕사(至德祠)를 찾았다. 오래전 동작문화원에 관람과 해설을 요청했는데, 연락이 왔다.

지하철 9호선 노량진역 2번 출구에서 버스를 타고 일곱 번째 정류장에서 내린다. 지하철 7호선 장승배기역 2번 출구에서 걸어가도 좋다. 사방으로 빼곡하게 들어선 아파트 사이로 한옥 건물과 기다란 담장이 보인다. 상도터널로 이어지는 지덕사 앞 도로는 양녕대군의 이름을 딴 양녕로다.

지덕사의 정문은 양명문(讓名門)이다. 양명은 말 그대로 명예를 사양한다는 의미다. 왕좌를 양보함으로써 조선 최고의 성군인 세종의 시대를 열었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양명문에는 입춘첩이 남아 있다.

去去益淸 至德遺風(거거익청 지덕유풍).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맑아지고, 지덕의 유풍이 이어진다는 뜻으로 읽힌다.

‘지덕’은 지극한 덕을 의미한다. 여기에는 고사가 있다. 중국 주(周)나라 태왕(太王)에게는 아들이 셋 있었다. 태왕은 맏아들 태백(泰伯)과 둘째 아들 우중(虞仲)을 건너뛰고 셋째 아들 계력(季歷)에게 왕위를 물려주고자 했다. 그러자 맏아들 태백은 동생 우중에게 왕위를 양보해야 한다는 뜻을 밝히고 함께 오랑캐 땅인 형만(荊蠻)으로 떠났다. 훗날 계력의 아들 창(昌)은 주 문왕(文王)이 됐고, 문왕과 그 아들 무왕(武王)은 주나라의 번성을 이끌었다.

공자는 아버지의 뜻을 헤아려 왕위를 양보한 태백을 두고 “태백은 지극한 덕이라고 말할 만하다(泰伯,其可謂至德也已矣)”고 했다.

[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양녕은 진실로 왕위를 양보한 것일까-지덕사에서
[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양녕은 진실로 왕위를 양보한 것일까-지덕사에서

둘째 우중에 대해 공자는 “왕위에 대한 욕심을 버렸으니 깨끗하며(淸) 사리에 맞는 처신(權)을 했다”고 칭송했다.

양녕대군과 효령대군(孝寧大君)이 셋째 충녕대군에게 왕위를 양보했다는 이야기 역시 이 고사와 연결된다. 양녕대군의 행동을 태백의 지덕에 비유한 것이다. 이러한 고사에서 유래해 양녕대군의 사당은 지덕사, 효령대군의 사당은 청권사(淸權祠)라는 이름을 갖게 됐다. 두 형제가 왕위를 양보한 일을 각각 지덕(至德)과 청권(淸權)의 상징으로 기린 것이다.

양명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간다. 세 갈래로 나뉜 돌길이 보인다. 왼쪽으로 가면 정원, 가운데 길로 올라가면 양녕대군의 묘역, 오른쪽으로 가면 사당이 나온다.

오른편 사당부터 둘러본다. 사당에는 양녕대군과 부인 광산 김씨의 위패를 비롯해 후적벽부(後赤壁賦) 팔폭병풍의 초서체 목각판, 숭례문 현판 탁본, 지덕사기(至德祠記) 등의 유물이 보관돼 있다.

양녕대군은 명필이었다. 〈지봉유설(芝峰類說)〉에 따르면 숭례문(崇禮門) 현판은 관악산의 화기(火氣)를 누르고자 양녕대군이 세로로 썼다고 전해진다. 이를 뒷받침하듯 양녕대군의 후손인 이승보(李承輔)가 고종 2년(1865) 경복궁 영건도감제조(營建都監提調)를 맡았을 때, 이 글씨의 탁본을 지덕사에 보관했다고 한다.

숭례문 현판은 임진왜란 때 유실됐다가 광해군 때 청파동의 배다리와 도랑 부근에서 극적으로 발견됐다고 전해진다. 이후 2008년 숭례문 방화 사건으로 문루가 크게 훼손되면서 현판도 일부 손상됐다. 지덕사에 소장된 탁본은 현판의 글씨를 확인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됐다.

[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양녕은 진실로 왕위를 양보한 것일까-지덕사에서
[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양녕은 진실로 왕위를 양보한 것일까-지덕사에서

돌계단을 올라가면 양녕대군의 묘가 있다. 봉분 앞에는 장명등과 묘비가 있고, 양옆으로 문석인 두 기가 서 있다. 묘비는 1910년 경술국치 전날인 8월 28일 한밤중에 벼락을 맞아 둘로 갈라졌다고 한다. 현재의 묘비는 1915년에 새로 세운 것이다.

지덕사는 1675년 숙종 때 양녕대군의 외손인 우의정 허목(許穆)의 건의로 남대문 밖 서부 도저동에 세워졌다. 당시 지덕사는 남관왕묘 건너편, 오늘날 용산구 후암동 일대에 있었다. 이후 1912년 현재의 자리로 옮겨졌다.

1990년대 말 방영된 KBS 대하드라마 〈용의 눈물〉에서 양녕대군은 자신이 왕의 재목이 아님을 깨닫고 어진 동생에게 왕위를 양보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그러나 양녕대군의 이후 행적을 살펴보면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다. 수양대군(首陽大君)이 계유정난(癸酉靖難)을 일으킬 수 있었던 배경에는 당시 조선 왕실의 최고 어른이었던 양녕대군의 지지가 있었다.

[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양녕은 진실로 왕위를 양보한 것일까-지덕사에서
[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양녕은 진실로 왕위를 양보한 것일까-지덕사에서

1453년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일으키자 양녕대군은 안평대군(安平大君)의 죄가 무겁다며 법률에 따라 처벌해야 한다고 주청했다. 안평대군은 결국 사사됐다.

1457년(세조 3년) 10월, 양녕대군은 단종 복위운동에 가담한 또 다른 조카 금성대군(錦城大君, 세종의 여섯째 아들·1426~1457) 등에 대해서도 엄중한 처벌을 촉구했다. 노산군(魯山君, 단종)을 끼고 종사(宗社)를 위태롭게 했다는 이유였다. 금성대군 역시 사사됐다. 〈세조실록〉은 “노산군은 금성대군이 사사됐다는 소식을 듣고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왕위를 양보했다는 양녕대군의 미담 뒤에는 이처럼 권력의 흐름에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낸 또 다른 모습이 존재한다. 양녕대군은 진실로 왕위를 양보한 것일까. 아니면 세자의 자리에서 물러난 뒤 다른 방식으로 왕실의 권력에 영향력을 행사한 것일까.

지덕사의 이름은 그를 지극한 덕을 갖춘 인물로 기억한다. 하지만 역사 속의 양녕대군을 오직 왕위를 양보한 인물로만 기억해도 되는지는 생각해 볼 일이다.

어찌 됐든 양녕대군이 임금 자리에 오르지 않은 것은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만약 양녕대군이 왕위에 올랐다면 우리는 세종이라는 성군을 만나지 못했을 수도 있다. 세종의 한글 창제와 여러 업적이 오늘날과 같은 모습으로 이루어졌을지도 알 수 없는 일이다.

조수진 전 국회의원
조수진 전 국회의원

글 : 조수진 전 국회의원
- 제21대 국회의원(전 양천갑 당협위원장)
- 국민의힘 수석최고위원, 최고위원
- 제21대 국회 법제사법, 국회운영위원
- 동아일보 정치부 기자, 논설위원
- 채널A '직언직설' 앵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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