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수종사(水鐘寺)에서 여유당(與猶堂)까지… 다산(茶山)의 흔적을 따라서

기획·특집 | 조수진  기자 |입력

운길산 수종사에서 마재까지, 다산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답사길 한강의 풍광과 왕실의 역사, 옛 능내역에 남은 시간의 흔적 정약용 형제와 천주교 순교사의 현장을 거쳐 여유당으로

[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수종사에서 여유당까지… 다산의 흔적을 따라서
[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수종사에서 여유당까지… 다산의 흔적을 따라서

매주 하루 정도 답사를 간다. 답사는 새벽 출발한다. 아는 만큼 보이듯, 일찍 나서면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다.

마재를 갈 때도 새벽에 집을 나섰다. 서울 서쪽의 양천구 목동에서 서울 동쪽을 지나 경기 남양주 마재까지는 제법 먼 길이다.

첫 번째 이정표는 운길산의 수종사. 수종사는 갔던 곳이지만, 마재에 가기 전 들르기 참 좋은 곳이다. 다산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의 생가가 있는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마재마을은 수종사에서 남쪽으로 8㎞ 떨어져 있다. 수종사에서는 마재 일대가 내려다보인다.

다산에게 수종사는 어린 시절의 추억이 깃든 곳이자 학문을 익히던 공간이었다. 어머니의 손을 잡고 찾은 곳, 형제들과 책을 지게에 지고 올라와 과거시험을 준비했던 곳이라 한다. 과거에 거듭 낙방한 끝에 마침내 급제하자 수종사에서 잔치를 벌였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운길산을 오르는 길은 무척 험하다. 급경사의 구불구불한 산길은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올라야 한다. 일주문과 불이문을 지나 해탈문에 이르기까지 오르막이 이어진다.

첫 문인 일주문(一柱門)부터 급격한 경사가 시작되고, 불이문을 지나면 길은 계단으로 바뀐다. 불이문 뒤로 거대한 석불이 모습을 드러내면 경내가 가까워졌음을 알 수 있다.

[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수종사에서 여유당까지… 다산의 흔적을 따라서

수종사 경내로 들어가는 해탈문은 규모만 보면 쪽문에 가깝다. 그러나 문을 받치고 선 수십 개의 돌계단이 오히려 그 존재감을 키운다. 해탈문을 지나면 비로소 다른 세계가 열린다.

기와지붕을 얹은 낮은 담장 너머로 북한강이 아득하게 펼쳐진다. 시선을 오른쪽으로 돌리면 남한강과 만나는 두물머리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우람한 은행나무 그늘 아래 바라보는 강 풍경은 한 폭의 수묵화다. 겸재 정선(謙齋 鄭敾, 1676~1759)이 두물머리의 풍광을 담아낸 그림 〈독백탄(獨栢灘)〉이 눈앞에 펼쳐지는 듯하다.

수종사는 조선 왕실, 특히 세조와 깊은 인연을 맺은 산사다. 1457년, 부스럼을 앓던 세조는 오대산 상원사에서 문수보살을 친견한 뒤 한강을 따라 환궁하던 길이었다. 두물머리 부근에서 하룻밤을 묵는데, 인근 운길산 기슭에서 종소리가 들려왔다.

폐사된 절터 주변의 동굴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이 공명해 낸 소리였지만, 세조의 귀에는 범종 소리로 들렸다고 한다. 이 전승에 따르면 세조는 절을 중창하고 수종사(水鐘寺)라는 이름을 붙였다. 세조는 절의 중창을 기념해 은행나무를 하사했다고 전해진다.

수령 500년이 넘은 은행나무 두 그루는 수종사의 상징이다. 높이 35m, 둘레 6.5m에 이르는 거목은 오랜 세월 이곳을 지켜 왔다.

범종은 1469년 세조의 며느리이자 성종의 어머니인 인수대비가 시주한 것으로 전해진다. 시아버지의 쾌유를 기원하는 마음이 담긴 종이다. 지금은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다산은 강진 유배 시절, 고향 남양주의 한강 풍경을 그리워했다. 바다를 바라보면서도 고향의 강을 떠올렸다고 한다. 18년의 유배 생활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초의선사(草衣禪師, 1786~1866)가 해남에서 죽로차(竹露茶)를 가지고 올라와 수종사에 함께 머물렀다.

그래서일까. 수종사는 불교의 차 문화를 이어 온 사찰이기도 하다. 경내 다실 삼정헌(三鼎軒)에서는 이곳을 찾은 이들에게 차를 내어준다.

수종사에서 내려와 입구 가까이에 있는 마음정원에 잠시 들른다. 북한강변의 습지와 넓은 터를 가꾸어 조성한 마음정원은 탁 트인 강 풍경을 즐길 수 있는 공원이다. 한동안 물멍을 하며 마음을 씻는 호사를 누린다. 입장료도 주차료도 없다.

[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수종사에서 여유당까지… 다산의 흔적을 따라서

마재로 가는 길, 이번에는 옛 능내역에 들른다. 2008년 중앙선 복선전철이 국수역까지 연장되면서 능내역은 문을 닫았다. 그러나 옛 중앙선의 흔적은 여전히 남아 있다. 기차는 더 이상 다니지 않지만 역사(驛舍)는 그대로다. 기차를 기다리던 의자와 빛바랜 흑백사진이 정겹다.

내친김에 옛 능내역 뒤편에 자리한 한확(韓確, 1403~1456)의 묘를 간다. 조선 초기 좌의정을 지낸 한확의 묘는 능이라 불렸을 만큼 위세가 당당하다. 수백 년 된 향나무와 함께 서 있는 신도비각을 비롯해 문인석과 망주석, 장명등, 혼유석, 향로석 등을 두루 갖췄다. 묘 뒤로는 소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둘러싸고 있다.

한확은 명나라 두 황제의 처남이었고, 딸들을 조선 왕실에 시집보냈다. 그중 한 명은 세종의 아들 계양군에게, 또 한 명은 수양대군의 장남 의경세자에게 시집갔다. 의경세자의 아내가 훗날 인수대비다.

한확의 묘가 왕릉에 견줄 만큼 위엄을 갖춘 데서 능내(陵內)라는 지명이 유래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다산의 생가에 가기 전 마지막으로 들른 곳은 마재성지다. 산길을 따라가다 동네 골목으로 150m쯤 걸어 들어가면 '성가정(聖家庭) 성지'라는 이름의 마재성지가 나온다.

정약용의 셋째 형 정약종(丁若鍾, 1760~1801)은 부인 유소사, 아들 정하상, 딸 정정혜와 함께 모두 순교했다. 가족이 신앙을 지키다 목숨을 잃은 것이다. 그래서 성가정 성지다.

한국 전통미를 살려 지은 고즈넉한 한옥 성당이 눈에 들어온다. 규모는 30평 남짓에 불과하지만, 성당 마당과 정원 곳곳에는 한복을 입은 예수와 성모 마리아상, 순교한 정약종 일가의 모습을 담은 모자이크 작품들이 조화롭게 배치돼 있다.

다산 형제들과 천주교의 인연은 깊고도 넓다. 초기 한국 천주교회의 주요 인물들이 가족관계로 연결돼 있었다.

맏형 정약현(丁若鉉, 1751~1821)의 처남은 한국 천주교회의 선구자로 꼽히는 이벽(李檗, 1754~1785)이고, 사위는 이른바 ‘황사영 백서(黃嗣永帛書)’로 알려진 황사영(黃嗣永, 1775~1801)이다. 한국 최초의 천주교 영세자로 알려진 이승훈(李承薰, 1756~1801)은 정약용의 누이와 혼인했다. 한국 천주교 최초의 순교자로 알려진 윤지충(尹持忠, 1759~1791)은 정약용의 외사촌이다.

정약종 일가는 박해의 소용돌이 속에서 목숨을 잃었다. 정약종은 신유박해(辛酉迫害, 1801) 때 순교했고, 아들 정하상(丁夏祥, 1795~1839)과 딸 정정혜(丁情惠, 1797~1839)는 기해박해(己亥迫害, 1839) 때 순교했다.

서소문 밖 네거리 일대는 여러 차례의 박해를 거치며 수많은 천주교인이 처형된 장소다. 서소문 처형장 터에 조성된 서소문역사공원 지하의 서소문성지역사박물관을 떠올린다. 그 입구 벽면에 새겨진 문구가 생각난다.

‘월락재천 수상지진(月落在天 水上池盡).’

달은 떨어져도 하늘에 있고, 물은 솟구쳐도 연못에서 다한다는 뜻이다. 이승훈이 참수되기 직전에 남겼다고 전해지는 이 말에는 생사를 뛰어넘는 믿음과 한국 천주교회의 아픈 역사가 담겨 있다.

마재성지에서 다산의 생가 여유당까지는 차로 5분도 채 걸리지 않는다. 운길산 수종사, 마음정원과 능내역, 한확의 묘, 마재성지를 차례로 둘러보고 여유당에 도착했는데도 오전 10시가 조금 지났다.

이른 아침부터 길을 나선 보람이 있다. 여유당 해설은 오전 10시 30분, 여유당 앞 실학박물관 해설은 오전 11시다.

조수진 전 국회의원
조수진 전 국회의원

글 : 조수진 전 국회의원
- 제21대 국회의원(전 양천갑 당협위원장)
- 국민의힘 수석최고위원, 최고위원
- 제21대 국회 법제사법, 국회운영위원
- 동아일보 정치부 기자, 논설위원
- 채널A '직언직설' 앵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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