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대를 이어야 하는 숙명-정조의 간택후궁 화빈 윤씨의 '상상임신'

기획·특집 | 조수진  기자 |입력

왕통을 이어야 했던 조선 왕실의 후계 문제 화빈 윤씨의 장기간 산실청 설치와 상상임신 의혹 왕실의 위계 속에서 살아간 후궁들의 삶과 흔적

[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대를 이어야 하는 숙명-정조의 간택후궁 화빈 윤씨의 '상상임신'
[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대를 이어야 하는 숙명-정조의 간택후궁 화빈 윤씨의 '상상임신'

조선의 왕에게 후사(後嗣)는 단순히 자녀를 얻는 문제가 아니었다. 왕통(王統)을 이어 종묘사직(宗廟社稷)을 보전하고, 왕위 계승을 둘러싼 정치적 혼란을 막아야 하는 국가적 과제였다.

정조(正祖·1752~1800)는 정비(正妃)인 효의왕후 김씨(孝懿王后 金氏·1753~1821)에게서 자녀를 얻지 못하자 세 차례 간택(揀擇)을 통해 후궁(後宮)을 맞았다.

후궁에는 왕의 승은(承恩)을 입어 입궁한 여인과 간택을 통해 선발된 여인이 있었다. 보통 전자를 승은후궁(承恩後宮), 후자를 간택후궁(揀擇後宮)이라 한다. 후궁은 입궁 경위와 책봉 과정에 따라 품계와 지위가 달랐다.

정조에게는 네 명의 후궁이 있었다. 의빈 성씨(宜嬪 成氏·1753~1786), 원빈 홍씨(元嬪 洪氏·1766~1779), 화빈 윤씨(和嬪 尹氏·1765~1824), 수빈 박씨(綏嬪 朴氏·1770~1822)다. 의빈 성씨를 제외하고는 모두 간택을 통해 입궁했다. 왕실의 웃어른인 정순왕후 김씨(貞純王后 金氏·1745~1805)도 간택 과정에 관여했다.

첫 번째 간택후궁 홍국영(洪國榮)의 여동생 원빈 홍씨가 입궁한 이듬해 세상을 떠나자 왕실은 후사를 위해 다시 간택을 진행했고, 1780년 화빈 윤씨를 맞았다.

화빈 윤씨는 남원 윤씨(南原尹氏) 가문 출신으로, 아버지는 관직을 지낸 인물이었다. 화빈은 창경궁(昌慶宮)에서 가례(嘉禮)를 올렸고, '화(和)'라는 빈호(嬪號)와 함께 경수궁(慶壽宮)이라는 궁호(宮號)도 받았다.

1781년, 화빈 윤씨가 임신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왕실은 곧장 산실청(産室廳)을 설치했다. 산실청은 왕실 여성의 출산을 준비하고 돕기 위해 임시로 설치하는 관청이었다.

그러나 기다리던 출산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산실청은 이례적으로 장기간 유지됐다. 1783년에는 20개월이 넘도록 산실청을 설치한 일을 비판하는 상소까지 나왔다. 산실청은 결국 그해 해체됐다.

후대에는 화빈 윤씨가 상상임신(想像妊娠)을 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물론, 이를 확정할 의학적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산실청이 장기간 유지된 배경과 그 과정에서 제기된 의혹은 당시 왕실의 후계자 확보가 얼마나 절박한 문제였는지를 보여준다.

그 사이 의빈 성씨가 문효세자(文孝世子·1782~1786)를 낳았지만, 문효세자는 1786년 세상을 떠났다. 같은 해 의빈 성씨마저 세상을 떠나면서 왕실은 후사를 위해 다시 간택을 진행한다.

1787년 정조는 수빈 박씨를 간택후궁으로 맞았다. 수빈은 반남 박씨(潘南朴氏) 가문 출신이었다. 1790년 수빈 박씨는 아들을 낳았고, 그가 바로 순조(純祖·1790~1834)다.

수빈 박씨는 현명하고 겸손한 인물로 전해진다. 원자(元子)를 낳은 뒤에도 왕비인 효의왕후를 극진히 섬겼으며, 혜경궁 홍씨(惠慶宮 洪氏·1735~1816) 등 왕실의 웃어른들에게도 예의를 다했다. 왕자를 낳았다고 해서 왕비와 대립하거나 자신의 지위를 앞세우기보다 왕실의 위계와 예법을 존중하며 처신했다는 것이다.

화빈 윤씨의 묘는 현재의 서울 서대문구 북아현동 일대에 있었다. 1937년 서삼릉(西三陵) 후궁 묘역으로 옮겨졌으며, 그곳에서 의빈 성씨의 묘와 이웃하게 됐다.

수빈 박씨는 왕의 생모로서 예우를 받으며 살다 1822년 세상을 떠났다. 처음 묻힌 곳은 양주 배봉산(拜峰山) 아래였다. 현재의 서울 동대문구 휘경동 일대다. 묘역은 휘경원(徽慶園)으로 조성됐다. 휘경동이란 지명은 휘경원에서 유래했다.

조선 왕실에서는 왕의 생모나 왕세자·세자빈 등 일정한 지위에 해당하는 왕실 인물의 무덤에 일반 묘(墓)보다 격이 높은 원(園)이라는 명칭을 사용했다. 휘경원은 왕을 낳은 후궁 수빈 박씨의 위상을 반영한 왕실 묘역이었다.

그러나 휘경원은 한곳에 머물지 못했다. 철종 때인 1855년 현재의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내각리, 선조의 후궁이자 인조의 할머니인 인빈 김씨(仁嬪 金氏)의 묘역 순강원(順康園) 인근으로 옮겨졌다. 이어 1863년 다시 세조의 능인 광릉(光陵) 인근, 현재의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로 천원(遷園)했다.

두 차례의 이장은 풍수지리상의 문제와 왕실의 능원 정비 과정 속에서 이뤄졌다.

남양주의 여러 능을 다니는 길에 휘경원에 들렀다. 그러나 원형 보존과 훼손 방지를 위해 일반에 공개되지 않아 원침을 직접 살펴볼 수는 없었다.

왕통을 이어야 한다는 숙명 속에서 살아간 후궁들. 그들의 삶은 왕릉과 원의 이름, 그리고 그들이 남긴 흔적 속에 조용히 남아 있다.

조수진 전 국회의원
조수진 전 국회의원

글 : 조수진 전 국회의원
- 제21대 국회의원(전 양천갑 당협위원장)
- 국민의힘 수석최고위원, 최고위원
- 제21대 국회 법제사법, 국회운영위원
- 동아일보 정치부 기자, 논설위원
- 채널A '직언직설' 앵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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