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정조의 비문에 남은 사랑-의빈 성씨(宜嬪 成氏) 성덕임

기획·특집 | 조수진  기자 |입력

아들과 사랑하는 여인을 잇달아 잃은 정조, 비문에 새긴 애절한 그리움 궁녀에서 의빈이 된 성덕임의 삶과 문효세자의 죽음 효창원에서 서삼릉으로 옮겨진 모자의 묘, 200년을 건너온 기록

[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정조의 비문에 남은 사랑-의빈 성씨(宜嬪 成氏) 성덕임
[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정조의 비문에 남은 사랑-의빈 성씨(宜嬪 成氏) 성덕임

“너는 멀리 떠났다. 너를 데려올 방법이 없고, 다른 사람을 보낼 방법도 없다. 참 슬프고 애달프다. 나는 저승에도 갈 수 없다. 너를 생각하면 애통하고 슬프다.”

정조(正祖)가 의빈 성씨(宜嬪 成氏, 1753~1786)의 묘비에 직접 지은 글, 어제비문(御製碑文)의 한 대목이다. 왕이라기보다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한 남자의 애절한 그리움이 절절하게 느껴진다.

이 글이 새겨진 비석은 서삼릉(西三陵)의 후궁 묘역 중 빈(嬪)·귀인(貴人) 묘역에 자리한 의빈 성씨의 묘 곁을 지키고 서 있다. 후궁 묘역은 빈·귀인 묘역과 숙의(淑儀) 묘역 등으로 나뉘어 있다. 빈은 정1품, 귀인은 종1품, 숙의는 종2품이다.

의빈 성씨. 조선 제22대 국왕 정조의 후궁으로, 이름은 성덕임(成德任)이다. 정조가 후궁으로 맞이하려 했으나 두 차례나 거절했던 여인으로 알려져 있다. 궁녀 시절부터 자신의 이름을 기록으로 남겼고, 왕의 사랑과 별개로 자신의 삶을 보여주는 흔적도 전한다.

1762년 음력 5월 13일, 영조(英祖)는 아들 사도세자(思悼世子)를 뒤주에 가두어 죽였다. 임오화변(壬午禍變)이다. 사도세자의 아들인 세손 정조는 어머니 혜경궁 홍씨(惠慶宮 洪氏)와 함께 외가로 물러났다.

당시 덕임의 아버지 성윤우(成胤祐)는 혜경궁 홍씨의 아버지 홍봉한(洪鳳漢) 집안의 청지기였다. 이 때문에 덕임과 정조가 이 무렵 만났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정조의 비문에 남은 사랑-의빈 성씨(宜嬪 成氏) 성덕임
[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정조의 비문에 남은 사랑-의빈 성씨(宜嬪 成氏) 성덕임

정조와 혜경궁 홍씨는 얼마 뒤 궁으로 돌아왔다. 정조는 할아버지 영조와 함께 경희궁(慶熙宮)에서 지냈고, 혜경궁 홍씨는 창경궁(昌慶宮)으로 돌아왔다. 이때 혜경궁 홍씨는 덕임을 처소로 데려왔다.

‘죄인의 아들’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살아야 했던 세손 정조에게 궁중 생활은 편안하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어머니의 처소는 그나마 마음을 놓을 수 있는 공간이었을 테고, 그곳에서 일하던 덕임과도 자주 마주쳤으리라 짐작된다.

1766년, 정조는 덕임에게 마음을 고백했다. 정조의 나이 열다섯이었다. 그러나 열네살 덕임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세손빈이 아직 자녀를 낳지 못했다는 것이 이유였다. 정조는 청풍 김씨(淸風 金氏) 집안의 김씨와 혼인한 지 4년째였으며, 훗날 효의왕후(孝懿王后)가 되는 세손빈에게 자녀가 없었다.

1776년, 정조는 험난한 왕위 계승 과정을 거쳐 마침내 왕위에 올랐다. 후사를 얻지 못하자 왕실에서는 후궁 간택을 추진했고, 1778년 정조는 홍국영(洪國榮)의 누이동생 원빈 홍씨(元嬪 洪氏)를 후궁으로 맞았다.

그러나 원빈은 입궁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누이의 죽음 이후 홍국영은 효의왕후를 의심하며 갈등을 빚었고, 무리한 행동을 거듭하다 결국 홍국영은 권력에서 물러났다.

정조는 다시 덕임을 떠올렸다. 그러나 덕임은 쉽게 마음을 열지 않았다. 1780년 정조는 후사를 위해 화빈 윤씨(和嬪 尹氏)를 후궁으로 맞았다. 이후에도 왕실의 후사를 둘러싼 기대와 압박은 계속됐다.

정조는 덕임에게 다시 구애했고, 덕임은 마침내 후궁의 길을 받아들였다. 덕임의 나이 서른 무렵이었다.

1782년 9월, 덕임은 아들을 낳았다. 훗날 문효세자(文孝世子)가 되는 왕자였다. 그해 12월 덕임은 종3품 소용(昭容)에 봉해졌고, 이듬해 2월 정조는 의빈(宜嬪)이라는 칭호를 내렸다.

『정조실록(正祖實錄)』에는 아들을 얻은 정조의 기쁨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비로소 아비라는 소리를 듣게 되었으니, 이것이 다행스럽다.”

[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정조의 비문에 남은 사랑-의빈 성씨(宜嬪 成氏) 성덕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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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에게 후계자의 탄생은 나라의 앞날과도 직결되는 일이었다. 오랜 기다림 끝에 얻은 아들이었으니, 정조의 기쁨은 남달랐을 것이다.

그러나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1786년 5월, 문효세자가 홍역으로 다섯 살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정조실록』에는 아들을 잃은 아버지의 슬픔이 여과 없이 드러난다.

"새벽에 발인을 하자 정조는 창경궁의 정문인 홍화문(弘化門) 밖으로 나와 곡하며 전별했다. 장례를 마친 뒤에는 친히 신주(神主)를 쓰고 초우제(初虞祭)를 지냈으며, 그곳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정조는 아들의 묘를 도성 가까이에 두고자 했다. 아들의 죽음을 애도하며 묘역을 정성껏 조성했다. 아들의 이름을 따 묘역을 효창원(孝昌園)이라 했는데, 현재의 서울 용산구 효창공원이다.

당시 효창원은 고양 율목동 일대로,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숲이 우거진 언덕에 자리했다. 덕임은 다시 아이를 임신한 상태였다. 아들을 잃은 슬픔에 더해 자신의 몸 속에 새 생명을 품고 있었으니, 그 심정은 어떠했을까.

아들이 세상을 떠난 지 넉 달여 뒤인 1786년 9월, 덕임은 세상을 떠났다. 뱃속의 아이 역시 태어나지 못했다. 덕임의 나이 서른 넷이었다.

정조가 남긴 기록에 따르면 덕임은 죽음을 앞두고 왕실의 후사를 걱정하며, 중전인 효의왕후가 자녀를 낳는다면 지하에서 기뻐할 것이라고 했다. 자신의 생명보다 왕실의 후사를 먼저 생각한 말이었다.

정조는 덕임의 묘를 문효세자의 묘 가까이에 마련했다. 두 사람의 묘가 나란히 자리하도록 한 것이다. 후궁과 세자의 묘를 함께 두는 일에는 예법과 격식의 문제가 따랐지만, 정조는 아들과 어머니가 가까이 머물도록 했다.

정조는 덕임을 위해 직접 글을 지었다. 비문에는 이런 구절이 남아 있다.

“의빈의 자취와 흔적이 모두 사라졌다. 그 뛰어났던 언행을 내가 아니면 누가 기록할 수 있으랴.”

또한 글의 끝에는 자신이 세상을 떠난 뒤에도 의빈이 멀고 오랜 세월 동안 배회하며 탄식하고 근심할 것이라는 애달픈 심정을 적었다. 정조는 덕임과 함께한 시간을 직접 기록했고, 묘지명인 『어제의빈묘지명(御製宜嬪墓誌銘)』을 남겼다. 사랑했던 여인의 삶을 기록으로 붙들어두려 했던 것이다.

[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정조의 비문에 남은 사랑-의빈 성씨(宜嬪 成氏) 성덕임
[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정조의 비문에 남은 사랑-의빈 성씨(宜嬪 成氏) 성덕임

정조는 덕임이 세상을 떠난 뒤에도 해마다 기일을 맞아 제문을 지었다. 그리고 덕임이 죽은 지 14년 뒤인 1800년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효창원의 풍경은 오래 보존되지 못했다. 넓은 숲이었던 효창원은 개항 이후 전쟁과 도시 개발의 소용돌이 속에서 훼손되기 시작했다. 1894년 청일전쟁 당시 일본군이 이 일대에 주둔했고, 1904년 러일전쟁을 겪으면서는 관사와 유곽 등이 들어서면서 묘역을 잠식했다.

1921년 일제는 효창원의 울창한 숲을 파헤쳐 골프장을 만들었다. 1930년대 말에는 효창원을 유원지로 조성하고 어린이 놀이시설까지 설치했다. 1940년에는 조선총독부 고시로 효창원을 ‘효창공원(孝昌公園)’으로 바꾸었다. 조선 왕실의 묘역이었던 효창원이 골프장과 유원지를 거쳐 공원으로 격하된 것이다.

그리고 광복을 1년 앞둔 1944년, 일제는 문효세자의 묘와 의빈 성씨의 묘를 서삼릉으로 옮겼다. 효창원 시절 문효세자의 묘와 의빈의 묘 사이는 불과 100보가량이었다고 전해진다. 정조가 두 사람을 가까이 두고자 했던 뜻이 담긴 거리였다.

그러나 서삼릉으로 옮겨진 뒤 두 묘의 사이는 떨어졌고, 지금은 출입구도 다르다. 정조가 마련했던 모자의 가까운 자리는 역사적 변화 속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문효세자의 효창원은 현재 서삼릉의 예릉(睿陵) 가까이에 있다. 효창원 입구에는 정조가 직접 글을 지은 신도비가 서 있다. 비문에는 아들을 먼저 보낸 아버지의 애통한 마음이 녹아 있다.

[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정조의 비문에 남은 사랑-의빈 성씨(宜嬪 成氏) 성덕임
[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정조의 비문에 남은 사랑-의빈 성씨(宜嬪 成氏) 성덕임

현재의 효창원은 영조(英祖)의 손자이자 사도세자(思悼世子)의 맏아들인 의소세손(懿昭世孫)의 의령원(懿寧園)과 이웃해 있다. 의소세손은 1750년 세자빈 홍씨, 훗날 혜경궁 홍씨에게서 태어나 왕세손으로 책봉됐으나, 세 살의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양주 안현 남쪽 기슭(현재의 서대문구 북아현동)에 묻혔지만, 도시 개발로 인해 1949년 서삼릉으로 옮겨졌다.

정조는 조선을 대표하는 군주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힌다. 그러나 그의 삶에는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사랑했던 여인을 먼저 떠나보내야 했던 슬픔이 겹겹이 쌓여 있었다.

의빈 성씨, 성덕임에 관한 이야기가 오늘날까지 자세히 전해지는 데에는 정조가 남긴 세심한 기록이 큰 몫을 했다. 덕임은 궁인 시절 소설 『곽장양문록(郭張兩門錄)』을 동료들과 함께 필사했다. 필사본의 여백에 ‘덕임’이라는 이름이 남아 있다. 왕의 사랑을 받았던 여인이기 이전에, 글을 읽고 쓰며 자신의 이름을 남긴 한 사람이었다.

서삼릉 의빈 성씨의 묘 앞에 서서 정조가 남긴 비문을 바라본다. 그는 사랑하는 사람을 되살릴 수도, 자신이 대신 저승으로 갈 수도 없었다. 다만 글을 남길 수 있었다.

그시고, 글은 200년이 훌쩍 지난 지금까지 남아 한 여인의 삶과 한 남자의 슬픔을 전한다. 정조가 비문에 남긴 것은 떠나간 사람을 잊지 못하는 마음, 그 마음을 기록으로 붙들어두려 했던 한 남자의 사랑이었다.

조수진 전 국회의원
조수진 전 국회의원

글 : 조수진 전 국회의원
- 제21대 국회의원(전 양천갑 당협위원장)
- 국민의힘 수석최고위원, 최고위원
- 제21대 국회 법제사법, 국회운영위원
- 동아일보 정치부 기자, 논설위원
- 채널A '직언직설' 앵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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