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수국사에서 서오릉 거쳐 서삼릉까지...왕릉에 깃든 조선의 이야기

기획·특집 | 조수진  기자 |입력

세조의 아들 의경세자부터 왕위에 오르지 못한 월산대군까지, 서오릉에 남은 왕실의 역사 단종의 누이 경혜공주와 고려의 마지막 왕 공양왕, 권력의 격변 속에 남겨진 비극 왕릉과 묘역을 따라 걷다 마주한 조선 왕실의 선택과 그 주변 인물들의 삶

[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수국사에서 서오릉 거쳐 서삼릉까지...왕릉에 깃든 조선의 이야기
[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수국사에서 서오릉 거쳐 서삼릉까지...왕릉에 깃든 조선의 이야기

답사지가 정해지면 새벽에 길을 나선다. 교통 정체가 없는 새벽길은 싱그럽다.

서오릉(西五陵)에 가기 전 수국사(守國寺)에 들른다. 서울 은평구에 자리한 수국사는 화려한 황금빛 법당이 이색적인 절이다.

수국사는 조선 세조 5년(1459)에 창건된 고찰이다. 세조의 맏아들 의경세자(懿敬世子)가 일찍 세상을 떠나자 고양 봉현(蜂峴)에 장례를 치렀다. 훗날 덕종(德宗)으로 추존되는 의경세자의 능인 경릉(敬陵)이 서오릉의 출발점이었다. 세조는 아들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며 능 인근에 정인사(正因寺)를 창건하도록 했다. 이후 의경세자의 동생인 예종(睿宗)과 계비 안순왕후 한씨의 창릉(昌陵)이 인근에 조성되면서 정인사는 경릉과 창릉을 돌보는 능침사찰이 됐다. 성종 2년(1471)에는 의경세자의 부인이자 성종의 어머니인 인수대비(仁粹大妃)의 후원으로 대대적인 중창불사가 이루어졌다. 당시 절의 규모는 119칸에 이르렀다고 한다.

18세기 들어 정인사는 또 다른 변화를 맞는다. 숙종과 인현왕후(仁顯王后)가 잠든 명릉(明陵)의 능찰이 되면서 이름도 수국사로 바뀌었다. 인현왕후는 숙종의 계비로, 1701년 세상을 떠났다. 수국사가 명릉의 능찰로 지정된 것은 경종 1년(1721)이었다. 이후 수국사는 왕실의 안녕과 국태민안(國泰民安)을 기원하는 사찰로 자리 잡았다.

수국사에서 나와 서오릉 방향으로 300m쯤 올라가면 행정구역이 서울에서 경기도 고양시로 바뀐다. 오늘날에는 서울과 경기도로 나뉘어 있지만, 조선시대에는 왕릉과 사찰이 하나의 역사적 권역을 이루고 있었다.

[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수국사에서 서오릉 거쳐 서삼릉까지...왕릉에 깃든 조선의 이야기
[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수국사에서 서오릉 거쳐 서삼릉까지...왕릉에 깃든 조선의 이야기

서오릉의 능역을 한동안 둘러본 뒤 서삼릉(西三陵)으로 건너가기 전, 능골마을에 들렀다. 낙타고개를 넘어서면 신원동 능골마을이 나온다. 이곳에는 도로를 사이에 두고 월산대군(月山大君, 1454~1488)의 묘와 사당이 나뉘어 자리하고 있다. 도로가 개설되면서 두 곳이 떨어지게 됐다고 한다.

월산대군은 의경세자의 맏아들이자 세조의 맏손자였다. 아버지 의경세자가 일찍 세상을 떠난 뒤 왕위에 오른 것은 숙부 예종이었다. 그런데 예종마저 재위 1년여 만에 세상을 떠났다. 예종의 아들 제안대군은 아직 어린 아이였다. 왕위 계승을 둘러싼 선택의 순간, 왕실은 월산대군 대신 그의 동생 자산군을 후계자로 결정했다. 자산군은 한명회의 사위였으며, 훗날 성종이 된다. 할머니 정희왕후(貞熹王后)와 어머니 소혜왕후(昭惠王后), 그리고 당시 왕실을 둘러싼 정치적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힌 결과였다.

월산대군이 왕위에 올랐다면 조선의 역사는 달라졌을까.

월산대군은 문학을 즐겼다. 고양 북촌, 지금의 능골마을에 별장을 두고 문인들과 교류했다. 그의 시조 한 수가 『청구영언(靑丘永言)』을 통해 전해진다.

“추강(秋江)에 밤이 드니 물결이 차노매라.
낚시 드리우니 고기 아니 무노매라.
무심한 달빛만 싣고 빈 배 저어 오노라.”

가을 강의 찬 물결과 빈 낚싯배, 그 위에 실린 달빛. 세속의 욕심에서 한 걸음 물러난 듯한 시조다. 왕위에 오르지 못한 그의 삶을 떠올리니 시구가 더욱 쓸쓸하게 다가온다.

월산대군은 어머니 인수대비를 극진히 봉양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어머니 간병을 하다 어머니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향년 35세였다.

[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수국사에서 서오릉 거쳐 서삼릉까지...왕릉에 깃든 조선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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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발한 지 300m쯤 됐을까. ‘경혜공주 묘(敬惠公主墓)’라는 안내판이 눈에 들어온다. 걸음을 멈춘다. 경혜공주 역시 왕실의 비극적인 역사 속에서 고단한 삶을 살아야 했던 인물이다.

경혜공주는 문종의 딸이자 단종의 누나다. 1436년에 태어났으며, 동생 단종은 1441년에 태어났다. 어린 남매는 아버지 문종과 할아버지 세종의 보호 아래 자랐지만, 왕실의 연이은 상례와 정치적 격변은 이들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다.

1450년, 경혜공주는 해주 정씨 가문의 정종(鄭悰)과 혼인했다. 그러나 혼인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할아버지 세종이 세상을 떠났고, 1452년에는 아버지 문종마저 승하했다. 어린 동생 단종이 왕위에 올랐지만, 그로부터 불과 1년 뒤 숙부 수양대군이 계유정난(癸酉靖難)을 일으켰다.

1455년 단종이 왕위에서 물러나자 경혜공주의 남편 정종도 역모에 연루돼 유배됐다. 경혜공주는 남편을 따라 유배지인 전라도 광주까지 갔다. 정종은 단종을 지지하던 금성대군(錦城大君)과 가까운 사이였기에 수양대군 세력의 견제를 받았다. 경혜공주는 유배지에서 아들 정미수(鄭眉壽)를 낳았다.

단종 복위운동이 실패로 돌아가고 단종마저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등돼 영월로 유배되면서 비극은 더욱 깊어졌다. 1457년 단종은 끝내 세상을 떠났다. 경혜공주의 남편 정종 역시 1461년 처형됐다. 정종의 시신은 훼손돼 여러 곳으로 보내졌다고 전해진다. 역모에 대한 처벌이 얼마나 가혹했는지를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경혜공주는 남편을 잃고도 살아남았다. 세조 사후에도 오랫동안 생존했지만, 끝내 1473년 세상을 떠났다. 향년 38세였다. 남편과 동생을 잃은 뒤에도 왕실의 한 사람으로 살아가야 했던 그의 삶을 생각하면 묘 앞에서 발걸음이 무거워진다.

경혜공주의 묘 옆에는 비석과 작은 봉분이 있다. 남편 정종의 단(壇)이다. 정종의 시신을 찾지 못해 가묘의 성격을 지닌 단을 마련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왕실의 공주였지만 남편의 온전한 장례조차 치르기 어려웠던 시대의 흔적이다.

경혜공주의 아들 정미수는 훗날 단종의 비 정순왕후(定順王后)와도 인연을 맺는다. 남양주 사릉(思陵)에 잠든 정순왕후는 단종 폐위 뒤 왕비의 지위를 잃었고, 친정마저 화를 입어 어려운 삶을 살았다. 정미수가 해주 정씨 가문의 선산에 정순왕후가 묻힐 자리를 마련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고 전해진다.

왕위에 올랐던 단종과 누이 경혜공주, 그리고 왕비의 지위를 잃은 정순왕후. 세 사람의 삶은 조선 초기 왕위 계승을 둘러싼 정치적 격변이 왕실 가족들에게 남긴 상처를 보여준다.

[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수국사에서 서오릉 거쳐 서삼릉까지...왕릉에 깃든 조선의 이야기
[조수진의 보이는 것 너머] 수국사에서 서오릉 거쳐 서삼릉까지...왕릉에 깃든 조선의 이야기

서삼릉으로 향하는 길에는 고려의 마지막 왕 공양왕(恭讓王, 1345~1394)의 능이 있다. 오른편에는 집들이, 왼편에는 논이 펼쳐지는 한적한 1차선 도로를 따라가다 보면 쌍릉이 나타난다. 공양왕과 순비 노씨(順妃盧氏)의 능이다. 무덤 앞에는 석인상 등 석물이 서 있다.

공양왕은 이성계 세력이 고려 왕실의 후계자로 추대한 인물이다. 1389년 왕위에 올랐지만 실권은 이성계 일파가 장악하고 있었다. 1392년 조선이 건국되면서 474년간 이어진 고려 왕조는 막을 내렸다.

폐위된 공양왕은 원주로 옮겨졌다가 공양군으로 강등돼 강원도 고성군 간성으로 이배됐다. 이후 삼척으로 옮겨졌고, 1394년 아들들과 함께 죽임을 당했다. 고려의 마지막 왕은 새 왕조가 들어선 지 불과 2년 만에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

조선 3대왕 태종은 1416년 공양군을 다시 왕으로 추봉하고 능을 정비했다. 공양왕이라는 시호에는 왕위를 공손히 양보했다는 뜻이 담겨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새 왕조를 세운 세력에 의해 왕위에서 물러나야 했던 인물이다.

흥미로운 것은 강원도 삼척에도 공양왕릉이 있다는 사실이다. 한 인물의 능으로 전해지는 장소가 두 곳에 존재하는 셈이다. 고양의 공양왕릉은 1970년 사적으로 지정됐다. 공양왕의 능이 고양에 있다는 기록과 지역 전승이 그 역사적 배경으로 거론된다. 다만 삼척의 능과 고양의 능이 어떤 관계인지, 실제 매장 장소가 어디인지는 단정하기 어렵다. 삼척에서 숨진 공양왕의 무덤이 훗날 고양으로 옮겨졌을 것이라는 추정도 있지만, 이를 확정된 사실로 보기는 어렵다.

정사(正史)의 기록과 별도로 고양에는 공양왕과 관련된 설화와 지명이 여럿 전해진다. 대표적인 곳이 식사동(食寺洞)이다. 전승에 따르면 폐위된 공양왕 부부가 쫓기다가 고양 땅에 이르렀다. 날이 저물자 부부는 하룻밤 묵을 곳을 찾았고, 한 스님이 이들을 알아보고 절에서 며칠간 머물도록 도왔다. 스님이 밥을 지어 날라 주었다는 이야기에서 절이 있던 마을의 이름이 식사리(食寺里)가 됐다는 것이다.

물론 지명의 유래를 이 설화 하나로 확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왕위에서 쫓겨난 고려의 마지막 왕이 고양 땅을 지나갔다는 이야기가 오랜 세월 이 지역에 남아 있다는 점은 흥미롭다.

왕릉을 따라 가다 보면 역사의 중심에 있던 인물들보다 그 주변에서 밀려난 사람들에게 더 오래 시선이 머물기도 한다.

왕위에 오르지 못한 월산대군, 남편과 동생을 잃은 경혜공주, 나라와 왕위를 모두 잃은 공양왕.

그들의 무덤은 권력의 선택에서 밀려난 사람들의 삶을 조용히 증언하고 있다.

조수진 전 국회의원
조수진 전 국회의원

글 : 조수진 전 국회의원
- 제21대 국회의원(전 양천갑 당협위원장)
- 국민의힘 수석최고위원, 최고위원
- 제21대 국회 법제사법, 국회운영위원
- 동아일보 정치부 기자, 논설위원
- 채널A '직언직설' 앵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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